21-12 신영복, <더불어 숲>, 중앙M&B, 1998.7쇄. **
P35 인류사가 이룩해 온 문명은 개별 국가의 흥망과는 상관없이 이어져 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특히 그리스, 로마의 문명이 그렇습니다. 나라가 없어진 것을 망이라 하지 않고 도가 없어진 것을 망이라 했던 고인의 역사관을 수긍한다면 국가란 문명을 담는 그릇이 못 되고, 문명은 국가라는 그릇에 담기에는 너무나 크고 장구한 실체인 지도 모릅니다.
P38 아이스킬로스의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가 그렇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바위에 결박된 채 매일매일 독수리에게 심장을 쪼이는 형벌을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절대 권력에 대한 굴종을 거부하는 데모스의 저항 의지를 장렬하게 보여줍니다. 제우스의 심복인 크라토스(힘)를 데모스가 쟁취하는 r서. 이것이 데모크라시입니다. 절대 권력에 대한 인민의 도전, 귀족에 대한 평민의 저항. 이 도전과 저항이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가 던지는 메시지이며 그것이 곧 민주주의라는 선언입니다.
P64 무소유는 간디경제학의 기본 원리이며 근대경제학에 대한 강한 비판 이론입니다. 필요하지 않는 것은 소유하지 않으며 쌓아 두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무소유 이론은 거대 자본의 전횡을 포용할 수 있는 비폭력 볼복종 투자의 경제학적 변용이면서 새로의 세기의 문명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진보는 삶의 단순화’(Progress is Simplification)이기 때문입니다.
P70 ‘문화의 자연’(Nature of Culture)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산업(Cultural Industry)이라는 말이 있지만 문화란 그 본질에 있어서 공산품이 아니라 농작물입니다. 우리가 이룩해 내는 모든 문화의 본질은 대지에 심고 손으로 가꾸어 가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사람에게서 결실되는 것입니다.
P71 진정한 문화란 사람들의 바깥에 쌓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성 속에 씨를 뿌리고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성숙해 가는 것이라 믿습니다.
P78 베트남은 푸른 들녘에 돌아온 백학과 자전거 위의 호랑이가 공존하는 나라입니다. 그들이 이제 억척 같은 과거를 씻고 다시 어디를 향하여 나아갈지 알 수 없습니다. 1세기가 넘는 장구한 세월을 식민지 침략과 전재의 포연 속에서 살아온 그들이 지금부터 모색하는 길이 어떤 것일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겪어온 혹독한 과거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P80 아사쿠사는 ‘키 작은 풀’이라는 뜻입니다. 아사쿠사를 시발역으로 잡은 것도 우연이었지만 나는 이 말만큼 일본을 잘 나타내는 말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키 작은 풀들이 사는 나라. 작은 주택과 낡은 가구들을 그대로 간수하며 살아가는 검소하고 겸손한 삶은 당신의 말처럼 무사의 지배 아래에서 오랜 전국의 역사를 살아온 백성들의 문화인 지도 모릅니다. ….. 주종관계를 축으로 하여 짜여있는 사회 조직에서부터 연공서열 또는 종신고용이라는 기업의 인사 원리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관철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98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오만을 ‘죄’로 규정하고 그것을 벌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오만이 인간의 자연에 대한 오만이건, 인간의 인간에 대한 오만이건 오만은 애정이 결핍될 때 나타나는 질병인 지도 모릅니다. ….. 진정한 애정은 일체의 오만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페테르부르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P101 지클론 B는 5kg으로 1000명을 살인할 수 있는 독가스입니다. 이 독가스가 2년동안 1만 kg이 소모되었다고 합니다. 가공할 대량 살인 공장입니다.
P102 빌리 브란트 총리가 이 곳에서 통곡하였고 지금도 유대인 다음으로 가장 많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독일인입니다. 독일 학생들에게는 수학여행의 필수 코스가 되고 있습니다. …… 청산 한다는 것은 책임지는 것입니다. 단죄 없는 용서와 책이 없는 사죄는 ‘은폐의 합의”입니다. 책임짐으로써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청산입니다.
P138 “로마는 게르만인이나 한니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힘 때문에 무너지리라”고 했던 호라티우스의 시구가 떠올랐습니다. 어떠한 제국이든 어떠한 문명이든 그것이 무너지는 것은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하부가 무너짐으로써 붕괴되는 것입니다.
P162 모든 관계의 비결은 바로 이 반과 반의 여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반의 환희’는 절반의 비탄과 같은 것이며, ‘절반의 희망’은 절반의 절망과 같은 것이며, ‘절반의 승리’는 절반의 패배와 다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절반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절제할 수만 있다면 설령 그것이 희망과 절망, 승리와 패배라는 대적의 언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동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P78 정작 피곤하게 하는 것은 라틴아메리카의 넓은 대지에 만연하고 잇는 사람들의 무심함이었습니다. 혼혈에 혼혈을 거듭한 인종의 복잡함과 그 복잡한 사람들의 낙천적인 표정 속에 묻혀 있는 실의 와 가난이었습니다. 사시사철 푸르름으로 대지를 덮고 있는 상록수의 초록빛이 그렇게도 미욱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습니다. 겨울의 엄혹함도 없고 가을의 추상 같은 반성도 없이 일년 내내 대지를 덮고 잇는 초록색이 마치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운 그림자 같았습니다.
P182 그들에게는 백인들에 대한 열등감이나 인디오에 대한 우월감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실로 예상하지 못했던 그들의 자부심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사고와 판단에 최후까지 끼어들어 끈질기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바로 열등감과 오만입니다. 심지어는 한 개의 옷을 선택하는 데에도 끼어들고, 한 개의 단어를 선택하는 데에도 끼어드는 것이 열등감과 오만이라는 자의식입니다. 멕시코의 젊은이들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튼튼한 기초와 평형을 확보해 놓고 있었습니다.
P194 “미국은 그런 점에서 북부나 남부나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름 그대로 뉴 잉글랜드입니다.” “미국의 아킬레스건이고 고질적인 콤플렉스입니다. 오히려 더 철저한 봉건적 구조를 내장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종의 용광로는 라틴아메리카입니다. 미국은 모자이크, 아니면 샐러드 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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