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신경숙, <아름다운 그늘>, 문학동네, 1995. *
P13 어느 해나 그 집 초봄의 마당 풍경 속엔 어김없이 이리저리 흩어져 종종걸음치는 노란 병아리 떼가 있었다. 마당 여기저기 놓여져 있는 병아리가 먹을 물 접시들. 언제든 드나들 수 있도록 돌이 괴어 있던 무덤처럼 둥그런 닭 우리.
P48 밤에 잠들 때는 모든 활동을 그치고 마음의 갈등을 쉬어야 한다. 아침에 깨어날 때는 모든 일에 마음을 쓰며 되돌아보아야 한다.
P96 나리꽃이 보이고 패랭이 꽃도 보였다. 절 집 뒤 곁 약수터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린 산맹감 몇 개 따먹는데 입 속으로 눈 속으로 아침 하늘이 쏟아졌다.
P98 추석 전날은 문풍지며 장롱 속이며 새로 단장된 집의 대문이 활짝 열리고, 장닭이 잡히고, 화덕에 걸린 솥에선 돼지 머리가 삶아지고, 아랫목에선 식혜가 삭혀지고, 시루떡이 쪄지고, 모시 잎 송편이 밥 소쿠리 가득 쌓여졌다. 차례 음식을 마친 밥에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큰 솥에 장작불로 물을 데워 커다란 고무 목욕통에 큰오빠부터 한 사람씩 우리 여섯 형제를 씻기곤 하셨는데 엄살부리다가 등에 빨간 손자국 하나씩 얻은 채로 목욕을 마치고서 새로 시친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 깃이 너무 빳빳해 목이 아프긴 했어도 뭔가 아련하니 좋았다.
P106 내가 당신을 닮은 것이 싫은 게 아니라, 내가 당신처럼 살게 되는 것, 어머니는 그것이 싫으셔서 지레 당신을 닮았다고 하면 화를 내셨지, 싶다. 어머니는 이미 그때 이 땅에서 여자로 태어나 이루어지는 삶이, 그것도 산골에서 태어나 살다가 그보다 그 닥 나을 것 없는 그 산골 앞 농가로 시집와 사는 여자의 삶이 얼마나 가파른 것이었는지를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그래서 혹시 당신 딸인 내가 그 삶을 잇게 될까 봐 그저 얼굴이 닮았다는 말조차 싫으셨던 게다.
P220 살다 보면 어느 때 청춘만이 아니라 병 마저도 사랑해야 하는 그런 때가 온다고. 그분은 짧은 기간에 청대 같은 자식을 앞세우고 동시에 남편을 여의는 상처를 지니고 계신 분이었다. 그래서 그분 입에서 말해지는 병 마저도 사랑해야 하는 때, 라는 말씀은 깊은 울림이 있었다.
P288 미천한 생물과 풀벌레에도 삶과 생명이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간절하고 아프게 들리는 연유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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