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중국 우루무치/투루판/돈황 2007. 4. 17-25일
2007년 4월 17일 밤에 출발하여 4월 25일 아침에 도착하는… 포커스투어로 실크로드// 인천-우루무치(1)-투루판(2)-선선-하밀(1)-돈황(2)-열차(1)-우루무치-기내박-인천
대한 항공 첫 직항로로 인한 실크로드로의 여행이다. 면세점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고 저녁 8시 35분에 비행기가 이륙하다. 3,400km를 대련과 북경을 거쳐서 우루무치에 12 40분에 도착한다. 비행시간은 5시간이며 시차는 1시간 젊어진다. 중국은 전 지역에 북경시각으로 맞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루무치의 시각은 2시간이 더 젊어진다. 공식적인 시간은 북경시간이지만 점심시간이나 출퇴근시간은 우루무치 시각으로 한다. 그래서 12시에 점심을 먹어야 하지만 2시에 점심을 먹고 출근 시간도 8시가 아닌 10시에 한다고 한다.
새벽 2시 10분에 김홍일 조선족 3세 가이드와 보조 가이드를 만나 호텔로 갔다. 신강성(우루무치 소재지)은 한국보다 따뜻하다. 해마다 섭씨 5도씩 높아진다고 한다. 이곳이 23도이면 투루판은 33도이다. 그리고 천산천지는 13도로 기온에 유의해야 한다. 이곳의 기후는 건조하다. 연 강우량이 200mm이며 증발량이 1,500mm이다. 천산 산맥으로 신 강을 남과 북으로 나눈다. 그리하여 북강과 남강으로 부르는 데 우루무치는 북 강에 속한다. 투루판은 남강으로 연강우량이 16mm 이며 증발량은 3,000mm이다. 이곳에서는 하루에 물을 한 병 이상 마셔야 한다. 건조하기 때문이다. 남강에서는 더 마셔야 한다. 수돗물은 만년설이기에 여과해야 하고 끓여 먹으면 탈이 안 난다. 여권을 분실 시에는 서안으로 가야 한다. 비행기로는 3시간, 기차로는 2일이 걸리고 재발급도 15일 이상 걸리니 주의를 요한다.
신강의 현지 식은 모슬림 지역이므로 돼지고기가 없을 수도 있다. 느끼하니 가능한 차를 많이 마시라. 또한 식 후에 냉수를 마시면 배탈이 나니 유의해야 한다.
4월 18일 (수)
비가 와서 천산천지로의 일정을 마지막 날로 바꾸어서 오늘은 남산목장과 홍산 공원을 방문한 뒤에 투루판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마침 신강의 박물관이 수리 중 이라 개장을 할 수 없었다. 아침 0시에 호텔을 나와서 남산 목장으로 향하였다.
우루무치는 200만 인구 중에 40%가 위구르 족(유럽과 아시아 혼혈)이다. 간판에 한자와 위구르 어(아랍어)가 적힌 것이 특이하다. 1년에 10번 정도 오면 비가 많이 온다 생각한다.
<남산 목장>
카자흐 족의 터전인 남산목장은 우루무치에서 남쪽 교외로 약 75km떨어진 천산산맥 북쪽자락에 펼쳐진 목장지대로 이곳에서 1시간 정도 가면 된다. 비가 와서 아쉽게도 말을 타보진 못하였다 작년 이맘때에는 눈이 많이 있었으나 지금은 풀이 나왔다. 해마다 기온이 5도 상승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오에는 대부분 젊은이들이 많이 산다. 설산이 보이고 카자흐 족의 말과 마부들이 호객을 하고 있지만 비가 와서 미끄러워 탈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40분 정도 오르면 폭포가 있다고 한다. 펼쳐진 초원과 산등성이와 초원에서의 양들 … 고지대이며 비까지 오기에 제법 추워서 얇은 파카를 입어야 했다.
**우루무치에서 돈황까지 900km이다. 4월부터 10월 중순까지만 관광이 가능하다. 위구르 어는 33개의 자모로 왼쪽부터 읽는다.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만 2,000만 명이 살고 있으며 1,660,000km의 면적에 47개의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다. 이들이 금하는 것 3가지가 있다. 첫째, 돼지고기를 안 먹고 돼지(“주”또는 “따루”)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울째, 위구르에서 사랑이란 말은 욕이다. 바보란 뜻이다. 셋째,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지 않는다. 소수민족인 그들은 병이 생긴다고 믿는다.
신강에는 카자흐 족이 200만 명으로 대다수가 유목민이다.
B.C. 138sus 한무제에 의해 장건 장군이 300명의 군사와 함께 실크로드를 13년 동안 돌아본다. 당시 흉노 족의 모둔 선우(모둔 왕)은 장 건을 잡아서 흉노족을 아내로 주고 10년 동안 살게 하였다. 왕이 죽은 틈을 타고 빠져 나온 장 건은 더 돌아보고 처자를 데리고 다시 한나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루무치는 아름다운 목장이란 뜻을 갖고 있는데 원나라 칭기스칸 때 나온 몽골어이다. 천산산맥을 기준으로 북강에는 인구가 많고 남강에는 사막지대로 거의 고비다. 고비란 몽골어로 몹쓸 땅이란 뜻으로 모래와 자갈과 흙으로 이뤄져 풀이 자라지 못한다.
이곳의 식생활은 한족은 면식과 입쌀밥과 콩물에 밀가루 반죽하여 튀긴 것을 찍어 먹는다. 위구르인은 면식이고 양고기와 낭(피자처럼 생긴 빵)을 흙 가마에 붙여서 소금물을 묻혀서 구워서 먹는데 건조하기에 잘 부식하지 않는다. 과일이 많고 일조량이 200일이 넘어서 달다. 또한 투루판에서는 90%가 농업이다. 특히 투루판 포도는 녹색진주라 하여 반찬처럼 먹는다. 아마 1년에 100kg정도 먹을 것이다. 8우러에 건포도가 많이 나온다. 투루판에 가면 곳곳에 벽돌집이 있는데 구멍이 뚫린 건물을 많이 볼 것이다. 이것은 건포도 건조실이
이곳은 도로 개설이 쉽다. 왜냐면 좌우로 고비이기에 건축자재가 널려있다. 신강은 강(疆)자로 이곳의 지형을 설명코자 한다. 먼저 활 궁( 弓 )자 이것은 신강지형이 이렇게 생겼다. 6개국이 붙어있다. 궁자아래에 흙 토(土)자는 5,400km의 둘레길이에 60만명의 러시안이 있고 우측가로 한 일(一)자는 알타이(황금이란 뜻)산맥을 이른다. 황금이 많고 평균해발이 2,000m이고 최고봉은 4,300m이고 길이가 600km이다. 한 일자 아래에 밭 전(田)자는 준가르 분지를 이름인데 8만 제곱킬로미터이고 중국의 3분의 1의 천연가스 매장이 되어있다. 4,900km의 천연가스관이 묻혀있고 3억의 인구가 사용한다. 또한 석탄, 석유가 많은 보배로운 분지다. 그 아래에 한 일자는 천산산맥을 이른다. 2,500km의 길이에 평균 해발은 4,000m이다. 설산은 5,445m이다. 북강은 천산산맥의 위쪽으로 초원이 있고 그래도 습도가 있다. 그러나 천산산맥의 아래쪽인 남강은 350,000제곱 킬로미터로 타클라마칸(죽음의 바다)사막이 있다. 이 한 일자 아래인 밭 전자가 이 남강을 이름이다. 그 아래 또 다른 한 일자는 곤륜 산맥을 이른다. 평균해발이 5,000m이고 최고봉은 8,000m가 넘고 길이는 2,000km이다. 이 곤륜 산맥으로 남쪽바람이 못 들어오기에 천산과 곤륜의 사이에 끼인 남강은 거의 고비이다. 실크로드의 북로는 총 길이가 7,000km인데 우리는 3,000km를 돌아볼 예정이다.
오늘은 우루무치의 남산목장과 홍산공원을 본 뒤에 투루판으로 가는 도중에 풍력발전소와 염호를 보고 계속 천산산맥을 좌측으로 하여 투루판으로 갈 예정이다.
지금(4월)의 양이 가장 맛있다. 왜냐면 고산지대의 풀이 염성분이 가장 많을 때이다. 대부분 털 깎는 양을 기르고 있다. 지금도 유목민들은 말을 타고 다니다. 신강에 오면 4가지를 준비해야 한다 긴 팔과 선그라스와 물병과 마스크이다.
조선족이 줄어들고 있다. 중국의 인구정책상 한족은 한 가정이 1명만 낳을 수 있다. 중국의 통계상 13억 6천이 인구이나 실상은 17억 정도이다. 그러나 계속 늘어나고 있다. 정책상 1인을 초과할 시에는 벌금이 있고 호적에 올릴 수 없기에 호적 없는 아이들이 많다. 특히 사천성, 구채구, 하남성에 많다. 대략 3억의 인구는 될 것이다. 인구 천 만이 넘으면 직할시인데 현재 상하이, 북경, 천진, 중경(3천만)이 그렇다. 교통난과 환경오염 차 사고가 중국의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장례; 유목민의 장례는 천장으로 10m정도의 제단을 쌓고 시체를 각을 떠서 놓으면 독수리가 와서 뜯어먹고 산다. 토장은 남자가 죽으면 땅 속에 2m내려가 머리를 북쪽으로 얼굴은 서쪽으로 두고 천을 3번 감아서 묻는다. 여자가 죽으면 천을 5번 감아서 똑같이 한다. 티벳 족은 수장을 한다. 돌에 묶어서 물고기들이 먹게 한다. 그래서 운남성 사람들은 물고기를 안 먹는다. 한족은 화장을 한다.
중국의 부자들은 항주에 가서 산다. 북쪽에는 벼농사가 가능하고 남쪽에는 어렵다. 호구제도는 시골에서 시내로 갈 경우에는 집을 사면 가능하지만 큰 도시 일 경우에는 그나마도 통제한다. 낙타는 빨라야 하루에 40km를 갈 수 있다. 당시 중국의 특산물인 실크와 차와 도자기는 유럽에서 인기가 있었다. 실크로도인 육로가 당나라때 없어지고 해상무역이 많아졌다. 감숙성에는 경제 재원이 없어서 기차울음소리조차 구차구차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중국에 올 경우 5월과 10월을 피하여 와야 한다. 6월과 9월이 관광의 적기이다.
우루무치 시내만 해도 해발 600-700m이다. 이곳은 오토바이가 없다. 80%가 오토바이 사고기에 버스는 1위엔-1위엔 50전이고, 택시는 기본료가 6위엔 인데 3km가 넘으면 1km당 1위엔 20전 추가다. 북경이나 상해는 택시가 10위엔 이고 심천은 택시가 12위엔 이다. 이곳은 소비도시로 10대 안이고 모든 것이 비싸다. 동북쌀이 500g에 1위엔 인데 이곳은 2위엔 이다. 아파트도 비싸다. 월세가 외곽이 500위엔이다.
<홍산공원> 우루무치 시가가 모두 보인다. 이곳에는 진룡보탑이 있는데 우루무치 시장이 미신을 믿어서 꿈 속에 이 홍 산 맞은 편 산이랑 끊겨지면 용이 일어나지 못하여 홍수가 나지 않는다고 하여 이곳에 탑을 세우고 맞은 편 산에도 탑을 세웠다. 이 이야기는 170년 전 이야기로 지금은 탑 밑으로 도로가 나 있는데 그 도로는 강이 변화여 된 것이라고 강을 다른 데로 돌리고 도로를 낸 것이다. 자연을 살려서 개발을 해야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도로 모양이 강 모양이었다. 우루무치의 시가는 번화하고 고층 건물이 많았다.
투루판으로 가는 중에 풍력발전소를 지나가게 되었다. 세계최대의 발전소로’07년에 700개의 풍차가 돌아간다. 좌측에는 설산이 보인다. 이곳은 일년 사계절 바람이 분다. 알타이 산맥의 시베리아 바람이 들어와서 천산산맥에 막혀서 3급-5급 정도의 바람이 늘 분다. 풍차의 높이는 38m, 날개가 18m이다. 처음에는 네덜란드의 풍차로 300만우엔 짜리를 들여왔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에서 높이 28m, 날개 14m를 생산해낸다. 날개가 바람방향에 따라 돌아간다. 거의 동남풍이 분다. 20분 정도 천산산맥을 끼고 가다가 그곳을 20분 정도 지나서 다시 50분 정도 가면 투루판에 도착하게 된다. 가는 중에 우측에 염호가 있었다. 소금이 바다의 20배 농도다. 대염호와 소염호가 있고 13억 인구가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식용으로는 불가하여 지금은 화학이나 세제용품으로 사용한다. 바닷 속의 가리비 껍질 등이 많은 것을 보아 예전에는 바다가 아니었는가 추측한다. 이제 천산 산맥 전까지는 풀들이 조금씩 보이다가 넘어가면 풀조차 없다. 한국 유학생이 우루무치에 많다. 교역 팀과 현지조선족을 합하여 1,000명 정도 거주한다.
달반성 마을; 풍력발전소 마을로 예전에 (1950년대) “달반성 처녀”란 노래가 있었다. 난신도로(기차길 3,000km) 즉 난징과 신강 도로 개설 시 천산산맥의 산을 뚫는데 13개의 굴을 뚫게 되었다. 모두 돌산이어서 11개의 굴을 둟고 모두 힘이 들어 할 때 이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달반성 처녀는 머리도 길고 눈도 크고 예쁩니다. 수박도 크고 답니다.” 라고 그리하여 일하던 청년들이 공사를 끝내고 달려오자 여자들은 노래와는 다르게 모두 기형이었고 수박도 없었다. 왜냐면 그 마을에는 해적들이 살고 친척끼리 결혼해서 기형이 많았다는 것이다.
천연가스관이 고속도로 옆(우측)에 흰 말뚝으로 표시되어 이어져 있었다. 바람 속도는 1초에 50m이다. 천산을 넘으면 바람속도가 17급이다. 이 바람으로 천산에 구멍이 파여 있었다. 여기에는 천산 설련(해발 4,500m이상에 나는 꽃)이 약초이다. 곤륜산맥에는 곤륜옥인 호탄옥이 많이 난다. 천산산맥을 넘어가면서 산마다 풀은 전혀 없고 돌과 모래만 있었고 바람도 뒷 바람에서 맞 바람으로 바뀌고 기후도 갑자기 더워지고 고온 건조한 바람이 분다.
투루판의 건포도는 건조실에서 한달 반이 걸려서 만들어진다. 1kg을 만들려면 10kg의 포도가 소요된다. 자연 건조실이 아닌 기계실에서는 10일이 걸리고 유황인 화학약품으로는 7일이 걸리지만 몸에 해롭다. 저녁 5시 30분에야 투루판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생포도 500만 톤이 생산되고 당도가 80%이다. 씨 없는 포도(녹색 포도)는 건조 시 당도가 70%이다. 콩알보다 작은 포도가 있는데 이것은 약재로 사용하고 맛이 없다.
투루판은 50만 인국에 면적이 한국보다 조금 적다. 22만 제곱 킬로미터이다. 카슈가르 위구르 인은 유럽인과 거의 생김새가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투루판의 80%가 위구르 족이다.
저녁 식사 후 투루판 야시장에 갔다. (9시 30분경) 그곳에서 스텐 쇠 꼬치에 꽂힌 양고기 구이를 먹었다. 야시장에는 먹거리가 가득-낭, 쌀 국수, 양 내장 탕, 말 창자 순대 등을 보았다. 간판에 한자로 청진이라 쓴 식당은 무슬림 식당이기에 돼지고기를 안 판다.
4월 19일 투루판은 해저 100m이고 오늘은 고차고성, 화염 산, 아스타나 고분 관람 후 점심식사를 한다. 식사 후에는 천불동, 소공탑, 고하고성, 카레즈를 본 뒤 피곤하면 오참(한 여름에는 필수)을 한다. 우루무치의 신강성 박물관은 수리 중이라 대신 민속 쇼를 보기로 했다.
이 투루판의 4대 제일 인 것이 있다. 첫째, 중국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해저 154m이다. 그러므로 기차역이 없다. 둘째, 가장 더운 곳으로 작년까지의 최고온도는 섭씨55도이다. 이곳에서 99km의 거리에 있는 화염 산은 7-8월이면 지표면 온도가 섭씨 82.3도까지 오른다. 셋째, 가장 건조한 곳이다. 연 강우량이 평균 16mm이고 1년에 비가 2-3번 오며, 증발량은 3,000mm이다. 넷째, 가장 단 곳이다. 이곳의 특산물은 포도로 연 일조량이 200일을 넘는다. 천산 산맥의 물이 지하수로 흐르기에 너무 차서 저수지에 모아서 온도를 높인 뒤 농작물에 공급하기에 광물질이 많고 농작물에게 이롭다.
황사가 심하면 2m도 안 보인다. 다행히 비가 온 뒤라 그런지 대체로 날씨가 맑다. 상하이에서 우루무치와 카자흐스탄의 상 열 국도를 달려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일정이며, 범죄를 해도 길이 없어서 도망을 할 수가 없다. 투하호텔은 추하 석유기지에서 세운 호텔이다.
트루판 관광은 흙 관광이다. 1,300년의 역사라도 풍화와 지진으로 많이 훼손되었지만 그나마 비가 없어서 보존된 것이다.
<고창고성> 흙을 쌓아서 만든 성이다. 반면 고하 고성은 흙을 파서 만든 성이다. 1,300년 이흥규가 이름을 이었는데, 한무제가 말을 좋아했다. 흉노족과 정쟁이 일어났을 때 겨우 살아나게 되어 흉노족을 두려워하게 되고 화친의 뜻으로 공주나 물건을 보냈다. 그러나, 한무제 때에 흉노족은 또 약탈을 했다. 카자흐의 조상이 우산 족인데 그 말이 천리마였다. 그리하여 말만큼의 황금을 보내 바꾸러 하자. 우산국이 사신을 죽인다. 이에 이흥규가 2-만 대군으로 와 화염 산에서 보니 높고 망망한 사막이라 하여 고창고성이라 하여 이곳에서 훈련하여 1,300년에 우산국을 멸망시킨다. 당나라 때 가장 흥왕하였다. 한 일화가 있다. 삼장법사가 실크로드로 지나갈 때 국문태 왕이 불심이 있었다. 그래서 왕이 하밀까지 법사를 모시러 갔다. 국문태 왕의 등을 밟고 왕좌에까지 앉게 하였다 법사는 왕좌에서 불문을 전했다고 한다. 떠나려는 법사를 강제로 있게 하자 법사는 금식을 하고 그리하여 천축에서 불경을 얻고 오면 1년 머물기로 약속을 한다. 그러나 3년 후에 오니 국문태 왕은 전쟁으로 죽게된다.
신강에는 서역 36국이라 하여 여러 나라가 있었다. 대부분 불교이었으나 후에 이슬람교로 변하게 된다. BC 1C 경교(기독교)가 불교로 AD 10C 불교가 이슬람교로 거란족이 최초로 이슬람화되면서 거란족 왕이 친구에게 전하여 몽고족 등 …. 이슬람교가 된 것은 카슈카르는 1,000년, 우루무치는 600년, 투루판은 500년, 하밀은 300년 정도가 된다.
고창고성은 99%가 위루르인이다. 성의 높이는 12m, 두께가 11m이고 면적은 5,000제곱 킬로미터이며 당시 인구가 사만 명정도 살았고, 귀족들의 공동묘지에서 수장품이 나왔다. 그 가운데 장웅(국문태 왕과 고종 사촌)장군 묘도 있다. 역사서를 보면 흙 외에 찹쌀가루, 꿀, 흙, 볏짚으로 섞어 쌓아서 단단하여 지금까지 남아있다. 성은 외성과 내성과 궁성으로 장방형으로 5km에 걸쳐있다. 외성은 농민들이 다 가져가 없고 내성만 남아있고 내성에서 10분 정도 들어가면 삼장법사가 설법하던 궁성이 남아있다.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타고 내성을 보면서 들어가는데 집터, 절터 등이 남아있어서 당시의 왕성하였던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궁성에 도착하니, 우측에는 삼장법사가 설법한 곳(300명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함)이 있고, 벽에는 구멍마다 부처가 있었다. 지금도 지붕은 복원이 불가능하다. 당시의 건축술을 엿볼 수 있었다. 좌측에는 궁궐터이며 중앙에는 부처가 있었는데 복원 중이다.
<아스타나 고분 군>
고창국 귀족과 당의 무덤으로 그때 당시 무덤 493개 출토된 것 중에 3개만 개방하고 있다. 당나라 때의 무덤(1,300년 전)의 부장품은 우루무치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2개의 무덤에는 벽화가 있다. 그 하나로 장웅(고창국의 장군)의 무덤이며 50세 죽었다. 왜냐하면 국문태 왕이 당나라와 불화하여 장웅이 화친을 권면하다 하다 화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무덤 안에서는 촬영이 금지되었다(벽화색상이 날아간다고 하여서) 지금도 미이라가 있었다. 벽화는 왼쪽부터 종(욕심 부리지 마라), 토인 (어릴 때 많이 배우라. 20대), 금(입을 막음-아는 것이 있어도 겸손 하라. 30대), 석인(과감 하라. 50대), 오른쪽 위부터 도자기(돈을 너무 좋아하면 깨진다), 잡초(잡초 같은 것도 아끼라), 실 뭉치(뭉쳐야 힘이 있다)의 벽화가 있었다. 장웅의 미이라는 박물관에 보관 되었는데 키가 170cm이므로 실제는 175cm 추정된다. 다음은 상인의 묘로 벽화가 고향의 새와 꽃 그림이었다. 이자는 장강 이남의 남방인 이었다. 다음은 부부의 묘로 미이라가 보관되었는데 입구에 12지간과 가운데 한 족의 초상화가 벽 그림 위에 있었다. 이곳은 지하가 10m이라도 습도가 제로이다. 그리하여 미이라가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천불동>
투루판의 가장 큰 석굴로 고창 국에서 20km떨어진 화염 산 기슭에서 석굴을 파고 도를 닦았던 곳이다. 일종의 굴 사원이다. 지금은 지진과 도교의 전파로 많이 파손되었다. 무슬림들이 벽화를 파손하고 뜯어갔다. 영국의 제크가 벽화를 네모나게 잘라서 가져가고 일본인도 뜯어갔다고 한다. 830여 개의 석굴이 있었고 40여 개의 벽화로 불법을 전파하고자 노력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천불동 가는 길에 만불산이 있고 화염산에는 등산로가 있는데 계단을 따라 오르내리는데 왕복2시간이 걸린다. 계곡에는 아리고 강이 교하고성에서 흘러서 나오고 왼쪽에는 서유기 촬영 세트 장이 있었다. 이곳도 역시 굴마다 번호가 매겨 있었다. 20번 굴에는 독일의 박물관에서 원본을 복사해온 복사본 4장이 액자에 걸려있었다. 그나마 원본도 2차대전시 없어지고 이 복사본이 유일하다고 … 가운데는 경전 보관 장소로 있었다. 31번 굴에는 사천대왕이 있는데 사각으로 떼어갔다. 그 중 1개는 우리나라에서 보관하고 있는데 일본인들이 해방하는 날 두고 도망쳐서 소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33번 굴에는 천장까지 빼곡히 불상들이 있다. 무슬림 들이 모두 없애기 귀찮아서인지 흙으로 분질러 놓았다. 36번 굴에는 와불을 통째로 도굴해 갔다.
계곡물은 천산의 빙하가 녹은 것이어서 겨울에는 물의 양이 적다. 이곳은 손을 닦고 물을 털면 재물이 날아간다고 생각하기에 절대로 손을 털어서 물을 없애면 안 된다고 한다.
<교하고성>
아리고 강이 북쪽에서 흘러서 갈라져서 성을 둘러서 흐르고 합쳐지는 곳에 세웠다. 버들잎 모양으로 높이가 30m,폭이 300m, 도시의 길이가 1,700m, 인구가 당시 5000aud 주거한 곳으로 높이 30m인 것은 자연적으로 생긴 성벽이라고 한다. 당시 흙을 파서 집 등을 만들었다. 고사국으로 예전에는 녹색지대였고 지금은 낙타 풀만 있었다.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한나라 대 흉노족에게 망하였다. (8개월간 포위하여 굴복시켰다고 함). 위구르족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영아 묘가 200여 개 출토되었는데 그때 전염병이 돌아 죽었다는 설과 흉노족의 노예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하여 죽였다는 설이 있다. 전망대가 있었다. 밤에는 승냥이불로 낮에는 연기로 봉화대로도 사용하여 자매국인 고창고성국(50km 떨어진)에게 알려 전쟁 시 도움을 받았다. 대불사와 불탑 등으로 그 곳에서 불교숭상을 알 수 있었다. 관청이 있던 자리도 높이 30m로 안에 우물로 사용했던 도르래(나무)가 있고 피난로로 사용한 지하로가 미로로 20-30m길이로 있다고 한다.
카펫트와 신강의 옥은 유명하다.
<카레즈>
지하만리장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중국의 동서를 횡단할 수 있는 정도의 길이다. 일종의 하수로를 이용하여 설산의 물을 이곳 지역으로 운반하는 것이다. 한 갈래 파는 데 6명이 한 조가 되어 3명씩 양쪽에서 마주 판다. 이것은 일정한 수장과 일정한 토질(찰흙)과 일정한 경사도가 있어서 수장과 수장 사이는 지그재그로 한다. 그 구조는 1. 수정; 밑으로 파서(아래서 위로 파는 형태) 2-98m이다. 2. 임거; 햇빛이 안 보이는 곳 –땅속. 3. 명거; 햇빛이 보이는 곳- 땅 위. 4. 저수지; 물을 고이게 하여 수온을 높이어 종업용수와 식수로 사용한다. 천산(2,500m)의 물이 화염 산에 막혀서 지하로 스며 듬에 따라 이곳에는 물이 거의 없게 됨. 그리하여 카레즈란 형태의 지하수로를 개발하게 되었다. 투루판에는 700개의 카레즈가 있는데 카레즈 간의 거리는 3-6km이고 화염 산 아래서 수정(카레즈)을 파서 땅 아래서 수정과 수정 사이를 등잔으로 각도를 맞추어서 투루판까지 파내려간 것이다. 한 갈래가 6인이 할 경우 3년이 걸린다. 중간에 임칙서와 좌종단의 상이 있었다. 임칙서 장군은 아편전쟁의 공로자이다. 그러나 정책상 이곳으로 유배를 와서 더욱 카레즈 개발에 힘을 썼다. 그리하여 칸 얼정이 1,237개로 실제로는 853개를 이용하고 총 길이는 5,000km이다. 옛 선인들의 지혜로 물을 풍부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소공탑>
높이 44m, 72개의 나선형계단. 청 대 어민허조(위구르인)란 사람이 청(좌종당 장군)과 손을 잡고 러시아를 몰아내어 건륭 황제에게 호평을 받고 아들인 슐라만이 은 7,000냥을 투자하여 아버지를 기렸는데 그 아들인 슐라만의 소와 공적을 넣어서 소공탑이라 한다. 230년 전의 흙으로 만든 탑으로 복원한 것이 아니고 그대로 보존된 것이다. 안에 건륭제의 하사비가 있다. 옆에는 모스크(회교사원)를 지어서 지금도 예배를 드리고 있다.
4월 20일
투루판에서 출발하여 선선의 쿠무타크 사막을 거쳐 고비사막을 지나서 마귀성을 본 뒤에 다시 나와 하밀에 가게 된다. 600km의 거리를 지나게 된다.
<쿠무타크 사막>
1,880제곱 킬로미터 고정성 사막으로 마침 초 중생들이 소풍을 나왔다. 그늘이 없는 모래밭에서 그들의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나무로 길을 만들었고 모래를 이용하여 거대한 부조의 조각들을 많이 만들어 놓았다. 인터넷에서 본 그 조각품들이었다. 안타깝게도 많이 부서져 있었다.
이곳 선선은 20만의 인구로 한족과 회 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도박은 중국에서는 불법이지만 투루판에서 유일하게 하는 것은 닭싸움이다.
<마귀성>
선선에서 180km를 2시간 30분을 달려서 가는 중에 황량한 벌판(사막)에 기이한 돌들이 무수히 있었다. 모두들 피곤하여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 입구에서 10분을 들어가면 풍화작용에 의해 형성된 바위인데 쌍두마와 거북이(한해신구)-마른 바다의 신 거북이가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100km를 더 가면 마귀성이 교하고성의 반 정도의 크기가 있다고 한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인터넷에 나오지 않아서 몰랐는데 그곳의 사진 책을 사서 보니 이 마귀성까지의 가는 길이 전부다 지질공원으로서 기암괴석이 펼쳐지는 곳이라 한다. 책에서 사진도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다.
하밀에 도착하여서 <회 왕릉>
귀족 가족들의 묘로 돌아올 회자를 썼다. 위구르 족들의 7-8대 왕족과 가족 묘가 있다. 30인(푸른 타일로 지은 전 안에)이 모셔져 있었고, 옆에는 나무로 지은 전에 장군의 가족 묘가 있다.
고속도로 양쪽에는 녹화사업으로 나무를 심어놓았고 각각 여러 줄씩 물을 대기 위하여 고무호스를 대어놓고 척박한 흙이기에 밑에 비료 흙을 두툼하게 깔고 심어놓았다. 투루판에서도 물이 귀하기에 도로보다 가로수가 심긴 곳은 낮게 되어서 저녁에 물을 주어 흐르게 만들었다.
4월 21일
일년에 열 번 정도뿐이 안 오는 비가 오늘도 이곳에 내린다. 하밀은 투루판과 비슷한 50만 인구도시로 50%가 한족이고 나머지는 회족과 카자흐족으로 이뤄졌다. 바리쿤 초원에는 카자흐 족이 20만 거주한다. 바리쿤이란 ‘범의 앞다리’란 뜻이다. 하밀은 경치 관광지이다. 돈황은 역사와 불교 문화지이다. 예전에는 상인들이 옥문관과 양관에서 지금의 비자를 받고서 역으로 갔다. 50분 정도 가면 천산산맥이 보인다. 좌측을 끼고 가는 천산의 설산은 실로 경관이다. 다시 돌아서 설산쪽으로 감에 따라 다시 우측으로 설산이 보인다. 천산산맥 안으로 들어서서 올라가는 것이다. 아래로는 빙하의 물이 흐르고 꽃이 피고 기이한 풍경이 펼쳐진다. 그보다도 오르는 길의 바위가 경관이다. 흐르는 물을 끼고 고사목들이 검은 바위와 어우러져서 눈을 못 떼게 한다. 소와 양을 많이 기른다. 말을 많이 기르면 그나마 있는 풀들이 피폐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풀의 윗부분은 소가 먹고 중간은 양이 먹고 말은 뿌리 채 먹기 때문이라고 한다.
점심 식사 후 1시 20분에 출발하여 저녁 6시경에 유원 역을 지난다. 지금은 인구가 3천명 정도 산다. 예전에는 돈황에 역이 없었기에 이곳을 통하여 돈황에 갔다. 작년(2006년)부터 돈황 역이 생겼다. 이곳에서 130km 가면 돈황이 있다. 막고 굴로 돈황이 유명해졌다. 큰 돈과 황제 황자를 쓰고 도로가 안 좋다. 돈황에는 한족과 회족이 산다.
4월 22일
오늘의 일정은 양관, 점심, 도황고 성, 명사 산(월아천)-비가 와서 낼로 미룸. 새로운 가이드 김복옥 가이드가 안내한다.
돈황에는 12만의 인구가 산다. 시내에만 5만 정도이고, 작은 오아시스이다. 이곳은 건조한 도시로 연강우량이 6mm내외다. 비가 적은 도시이기에 물과 야채를 다량 섭취해야 한다. 아침은 춥고 점심은 덥고 저녁은 바람불고 춥다. 즉 일교차가 큰 곳이다. 난로 앞에서 수박을 먹는 도시이다.
*실크로드의 시발점이다. (한무제 시기에)서안의 서쪽 문에서 출발하여 돈황을 거처 천산 남로와 북로로 갈라진다.
*진나라의 진시황 때의 돈황은 중국 땅이 아니었다. –옥문관(양관)
*한 고조 유방의 초한 전쟁으로 만리장성 쌓고 왼쪽은 흉노족으로 여러 차례 전쟁이 있던 곳이다.
*<양관>-서역을 가려면 꼭 거쳐야 되는 곳으로 한나라 때의 봉화대 유적지(돌로 쌓음)만 남아있다. 한나라 때의 장성은 흙으로 쌓았기에 파손되고 없다. 비석도 남아있다. 옛적에 장사꾼들이 많이 다녔다.
*이야기-서유기의 삼장법사는 비자없이 도망하여 17년동안 유학을 하였다. 당태종 이세민 때에 돌아온다. 이에 마중까지 나간 당태종
*이야기-당의 한 공주가 양관에 머물다 바람이 심하여 대신과 금은보화와 도자기가 묻히게 되었다. 지금도 바람이 불면 땅 속의 도자기를 볼 수 있다.
*중국에는 부자도 거지도 많고 황제의 귀족이 살았기에 목청도 높다. 이곳은 사막지대로 폐병이 많고 벼농사가 아닌 밀을 주식으로 한다. 고비사막에는 오로지 낙타풀만이 있다. 돈황 인들은 얼굴이 검다. 자외선이 강하다.
*이야기-사대임인인 양귀비는 몸이 풍만한 미인으로 노래와 춤과 지식이 높았다. 당현종의 아들에게 시집가 5년 후 당현종의 비가 된다. 그녀는 28-38살에 자살한다. 안록산이 양귀비를 어머니로 삼았다. 안록산은 양귀비의 애인이었다. 침실에서 들키려 하자 배가 너무 커서 침대 밑에 못 들어가고 양귀비의 치마 밑으로 들어간다. 들키자 그는 어머니기에 치마 밑에 들어갔다고 변명을 했다.
*이야기-13릉의 왕릉이 모두 흙인데 반하여 양귀비의 릉은 시멘트이다. 그 일화로 26세된 여자가 얽힌 얼굴로 울다가 흙을 가져가자 예뻐지다. 그리하여 모두들 그 흙을 가져가기에 결국은 시멘트로 만들게 되었다는 이야기. 양귀비는 몸에서 암내가 났다. 그래서 하루에 5번씩 목욕을 했다고 한다.
*하밀에서 걸어서 일주일을 가면 돈황이고 다시 주천으로 가는데 이곳에서 곽거병 장군이 술을 물에 타서 먹었다. 주천에서 무암을 거처 서안으로 간다.
옛적에는 도보로 25km뿐이 못갔다. 홍화 공주를 흉노족과 결혼시키려 함 그 인물화와 부처상 등 서역식 물본 등이 있었다. – 돈황고성 박물관에 이관살구는 이광 장군이 목말랐을 때 (원정 시) 살구 향이 나서가서 살구를 먹고 씨를 가져와 전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수염이 없으면 죄인이었고 수염의 길이가 길수록 서열이 높았다. 병마총은 보통 키가 170-185cm이다. 한무제는 5번째 황제로 54년간 황제를 했다. 무릉은 서안에 있으며 만드는 데 54년이 걸렸고 재정수입의 3분의 1을 이곳에 18년간 소비했다. 도굴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발굴하지 않고 있으며 그 외에 74개의 무덤이 더 있다. 한의 4번째 황제까지만 발굴하였다.
*장건 그림
지팡이에 달린 술의 빨간 송이가 길수록 급이 높다.
이야기-장건이 돈황에서 잡히고 흉노왕궁에서 11년을 살다가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탈출하여 돌아옴. 곽거병 장군은 24세에 죽였는데 16세에 병사가 되고 18세에 장군이 되어 19세에 원정하여 한나라 땅을 넓혔다.
한무제는 화친을 위해 공주를 시집 보내는 것을 싫어했다. 예전에 공주를 좋아한 적이 있다.
*말 여권이 있었다. 나무로 되고 안에 글씨가 있다.
*호부-호랑이를 반으로 자른 장신구로 장군의 자격표로 10cm내외로 이것이 있어야 병사를 데려갈 수 있었다.
*봉화대에서 사용한 짚은 말똥을 묻혔다. 낮에는 검은 연기가 나와서 이 지역은 황사로 흰 연기로는 멀리 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돈황 고성>
1978년도에 일본에서 만든 영화세트 장으로 돈황 정부에서는 남겨두라고 한고 일본인은 부셔놓고 가겠다 하여서 중국정부가 가져가려면 재 한 더미도 남기지 말라고 하자 결국 남겨두게 되었다.
무위시(양주)로 지금의 지명이다. 중국의 고성들은 성내 인을 보호하기 위해 성 밖과 안에 해자가 있었다.
4월 23일 (월)
예정 9시 막고굴 예약 오후에 명사산과 월아천 관광 후 사주시장(돈황 재래시장) 관광 후 저녁 8시 돈황 역에서 기차 승차할 예정임
<막고굴>
벽화각 1,000여 개로 492개의 굴이 보존되어있고, 8개의 굴을 보게 된다. 한족인 전문강사가 있고 16호와 17호굴을 반드시 본다. 혜초 스님이 쓴 책도 볼 수 있다. 굴 안에는 등이 없고 강사가 손 전등으로 비취며 설명하게 된다. 회손을 막기 위하여서라고. 막고굴은 B.C. 400년부터 1,000년 동안 만들어진 것이다. 청나라때 1900년 왕도사가 발견하였다. 그는 많은 도자기와 경전 등을 판매하여 그 돈으로 절을 보수하였다. 영국의 스타인과 일본과 독일에서 사갔다. 한국 박물관에도 일본인이 해방되던 날 남기고 도망가는 바람에 경전이 있다.
3대 석굴 중 하나인 운강 석굴은 막고굴보다 규모가 크다. 그러나 벽화가 아름답지 않다. 벽화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당나라 때다. 층계가 남겨져 있다. 벽화는 거의 100년 간격으로 보수하였다. 수나라 벽화가 남겨져 있고 1,000개의 굴이 있어서 천불동이라 한다. 사진은 9층 탑만 촬영이 가능하다. 8개의 굴을 보는데 1시간 40분에서 2시간 정도 소유된다.
왕도사의 일생-어릴 땐 도교인. 경전 등을 팔고 나서 정신병으로 죽었다. 그 뒤에 제자들과 자녀들이 지어준 탑이 있다.
*첫 번째 굴
낙존 스님이 실크로드 따라가다가 명사산 밑에 오다가 산에서 금빛이 나는 것을 보고 그것이 부처님이 만든 빛이라 하여 만들기 시작했다. B.C.436년이 시초로 왜? 사막에 만들게 되었나? 저녁에 올 때 빛이 보여서 만든 것이다. 그 후에도 계속 석굴을 만들었다. 사막지대가 건조한 지대이기에 벽화가 보존 되기 때문에 굴을 팠다.
^^어제 비가 왔기에 사막에서 안개가 끼고 하늘에는 황사가 없어서 한국의 가을 날씨 같았다. 아님 지금쯤 무지 괴로운 날이 되었을 텐데…
이곳에는 기륜 산맥의 옥석이 유명하다. 이 옥석은 밤에는 빛이 난다. 그것으로 만든 잔을 야광배라 하여 이곳의 특산물이다.
Gate 96 ; 미륵대불-높이가 35.5m로 세계에서 3번째이다. 첫 번째는 사천성의 낙선대불로 높이가 70m이고 두 번째가 아프카니스탄의 불로 높이가 55m이다.
이곳은 목심불(나무)이 대부분이지만 이것은 석심불(돌과 짚이 같이 섞인 것)로 실내대불(당초에 측천 무후때 제작됨)로 밑에 구멍이 2개 있다. 내부는 당대 지면이 제일 낮고 서하-원대-청대-국민당 시대별로 높이가 보수되어 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막고굴은 1961년3월 4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1987년에는 중국이 5개의 유네스코지정이 있었다. 서안의 병마용, 막고굴, 자금성, 만리장성, 태산이다. 소련은 2개 있고, 한국은 7개이다- 불국사, 석굴암, 종모, 팔만대장경, 수원성, 경주 남산, 판소리이다.
막고굴의 입구의 9층루는 원래는 4층루였다. 1928년에 9층으로 복원함으로써 부처상이 가려지고 겉의 벽화가 떨어졌다. 지금의 것은 송대의 것이다. 번호마다 동굴로 즉 부처의 아파트이다.
Gate 130 ; 남대불로 높이가 26m이다. 당대 현종때 제작한 것으로 미륵 대불로 석심불이어서 짚과 돌과 흙으로 제작되었고 보존이 잘되어 있다. 오른 손만 송대에 수리하였고 왼손이 손가락이 올라간 모습이 아름답다. 머리카락이 없고 쭉 뻗은 콧날과 두툼한 입술과 긴 귀, 손마디가 3-4개이다. 30군데 이상이 다르다.
산 속에서 어떻게 큰 대불을 팠을까? 밖에서 사다리 만들고 위에 구멍을 내서 위에서 아래로 파 내려왔다. 남대불은 29년간 제작되었다. 남대불 꼭대기에는 용 2마리가 금박으로 그려져 있고 비천성도 그려져 있다. 가장 큰 보살상 그림은 15m이다.
Gate148; 와불로 길이가 15m로 얼굴, 손, 발도 금박으로 됨. 당대 A.D.775년 제작. 부처님 열반 시에는 머리가 북쪽으로 얼굴이 서쪽으로 향한다. 그러나 이 와불은 반대로 했다. 머리가 남쪽으로 얼굴이 동쪽으로 향했다. 왜냐면 굴의 방향상 어쩔 수 없었던 듯하다. 얼굴표정이 행복해 보이고 허리부분이 여성처럼 날씬하다. 당대의 미의식으로 여성스럽게 했다. 72명의 제자들이 울거나 웃는 형상으로 둘러 쌓여있다. 천정에는 천불상(많다)이 그려져 있다. 화공들이 누워서 천정에 그렸다. 동굴 모양의 (석관) 모양으로 열반모양 그러므로 열반 굴이다. 입구에 왼쪽 비석(당대)의 글자를 통하여 이 굴의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금강력사 4명이 지키고 있고 대부분의 입구 앞에는 누각이 다 있었는데 손실 되었다.
Gate 237; 막고 굴(사막의 높은 곳의 동굴). 당은 초, 성, 중, 말의 4시기로 나눈다. 당대 중기에 1,200년 전에 제작되었다. 안에 불상만 청 대에 보수하였다. 관세음, 보행보살, 만수보살, 벽화그림은 당대 벽화 그대로이다. 왼쪽은 서광정토로 극락세계를 그렸다. 부처 앞에 악기로 연주하는 것을 보면 그 악기는 생황, 피리, 수족, 박판, 궁후, 완함, 비파, 아쟁이다. 장고(내몽골)등에 비파(판단비파)가지고 춤을 춤/카르빙가는 불교의 음악 주관 신이다. 화공들이 큰 왕궁기대로 재현코자 하였다. 비천상은 중국식의 천사이다. 신라의 화랑도 벽화 속에 등장하는 데 김춘추의 아들이 김대문으로 신라의 왕자이다. 몽골의 왕자, 위구르, 티벳 여왕이 왕자들 앞에 있었다. 왜냐면 B.C. 822년은 중당 시대로 티벳이 통치하였다(토빈족).
Gate 249; 2층. 위진 남북조 시대(소위시대) 1,500년 전 제작된 것으로 불상만 청 대 수리하였다. 부처님 상이 여성 같다. 벽화도 당시 그대로이다. 천정우측에는 수렵도(사람이 말 타고 활 쏘는), 쌍두호랑이(왜냐면 화공의 큰 실수이다. 화공이 호랑이를 못 봐서 상상 속에서 그렸기 때문이다), 멧돼지, 소.
사람머리가 13개, 9개, 11개 인 것은 신수로 중국 삼국시대의 삼하경에 나온다. 위 가운데 눈이 4개, 팔이 4개이고 손에 해와 달을 든 것은 아수라상이다. 앞에는 통신(바람신), 수신, 천둥신, 비신-풍, 우, 뇌, 전신이 있고, 뒤에는 주작, 형무, 좌에는 청룡, 우에는 백호가 있다. 좌측벽면에는 인도 풍의 부처(힌두교 양식)가 있는데 초기 동굴에 많이 볼 수 있다.
Gate 259; 1,600년 전 위진 남북조 시대로 전면 위만 송 대에 수리했다. 우측 부처는 코가 높고 치마를 입음. 나무기둥을 넣고 흙과 짚으로 엮어 만든 목심불이다. 두 개의 부처가 중앙에 있고 우측에도 부처가 3.
Gate 328 1층에 위치하고 당 초기시대 1,300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불상, 벽화가 그 당시 그대로이다. 본존불-석가모니 가사가 실크같이 부드럽게 표현되었다. 가석준좌-고개를 약간 숙인 자세이며 우측에는 늙고 세련된 노인상이 있다. 보좌상은 풍만하고 관능적이다. 보좌상 하나가 1924년에 없어졌다. 불상들에는 금박이 입혀 있었고 벽화그림도 그대로이며 바닥 위의 연꽃 문양은 닳아서 없어졌다.
Gate 16-17 입구 우측에는 종이 있고 좌측에는 북이 있다. 우측의 17번에는 당 말기 막고굴 가운데 유명하다. 장경동(경서를 숨기는 동굴)으로 안에는 홍현 스님을 기념하여 AD 869년에 불상이 세워졌다. 스님의 사리가 지금 등 뒤에 보관되어있고 벽화에는 보리수나무(밑에 수하미인-양귀비 같은), 당대 가방, 물병 그림, 큰 부채든 비구니 승이 그려있다. 어떤 이유로 막아버린 것일까? 1035년 외부의 공격에 보존키 위해 경서를 다 넣고 흙을 붙이고 그림을 그려놓았다. 천년 동안 보존되다가 1900년에 왕도사가 황사를 청소할 때 이 벽이 무너져 내리면서 문서가 이 안에서 54,000개가 나왔다.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도 나왔다. 지금은 진품이 없어졌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이 모두 가져갔기 때문이다. 왕오천축국전은 프랑스 파리시내 기멧 박물관에 있다. 돈황은 학술역사 중 제일 슬픈 역사다. 16번은 불상이 당 말기인 1200년 전에 세워진 것으로 청대에 수리하였다. 특징은 부처의 눈동자가 유리로 만들어져 있다. 봉황새 한 마리와 4마리의 용(천정중앙)이 금박으로 있었다. 사암을 인공적으로 파서 천정 연꽃을 전부 금으로 밑에는 천불상이 그려져 있다.
막고굴 박물관; 영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미국 등 이곳의 유물을 가져간 나라의 사람과 물품이 사진으로 전시되었다. 진품 경서를 유리 안에 보관하였다. 벽에 걸린 그림들 모두가 모조품이다. 티벳어는 가로로 위구르어는 세로로 쓰여 있었다. 벽에 왕오천축국전(AD717년-) 혜초 스님의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네팔의 여행 후에 당시에 중국 산서성에서 돌아가셨다. 대진 경교라 하여 초기 기독교 경전도 있었다.(위구르 기도문, 유태교 기도문 등) -----막고굴 가이들 이름 – 부개군
조크
6개 대학 1. 예일대학; 예순에 일을 한다. 2. 하바드 대학;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다니다. 3. 하와이 대학; 하루 종일 와이프 옆에 있는다. 4. 동경 대학; 동네 경로당에 있는다. 5. 방콕 대학; 방구석에 콕 박혀 있는다. 6. 조선대학; 조상인 선조에게로 돌아간다.
명사 산; 시내에 위치하고 있다. 명사 산 안에 월아 천이라 오아시스가 있다. 월아 천에는 도사원이란 도교 사원이 있고 월아 천은 초생 달 모양의 천이 있다. 물이 마른 적이 한 번도 없는 오아시스이다. 명 사산의 고운 모래로 사진기를 조심해야 한다. 비가 온 까닭에 모래가 덜 날리고 맑은 날씨이다. 그러나 평소에는 모래가 날려서 두건 없이는 다니기가 어렵다.
사주시장; 돈황 시내에 있는 전통재래시장이다.
돈황역에서 저녁에 출발하여 (기차로 4인실) 다음날 10시 20분경에 우릉우치에 도착할 예정이다.
4우러 24일 (화)
돈황역-천산천지(식사)-카펫트 쇼핑-한식으로 식사(고려관)-인민광장-평양 전시관-바자르-공항도착
중국식 사우나 후 야시장에서 시간 보냄. 비행기는 새벽 2시발
실크로드 길 왕복 기차로 1,040km와 버스로의 길이 약 3,300km를 다녔다. 서안에서 로마까지는 7,000km이다. 이번 여행은 사막에서 비도 구경하고 천지는 비가 오면 못 본다. 그러나 오늘 날씨가 화창하다.
카자흐 사람들은 일평생 3번 목욕한다. 태어날 때와 결혼할 때와 죽을 때이다. 또한 고산지에서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면 위험하다. 이곳 티벳은 경치관광이다. 천산천지로 가는 길은 그야 말로 아름답다. 유목민의 텐트인 빠오가 곳곳에 보이고 고복들에서 돋아나는 새순들도 볼 수 있었다. 설산의 물이 흐르고 소들도 버스를 피하지 않아 버스가 기다리거나 피해간다. 이곳은 해발 1,930m이다. 낮 12시 10분경 천지 매표소에 도착해서 1,600m지점에서 전동차를 타고 천지로 올라간다. 동서로 3km, 남서로 6km이며 박격달 봉은 5,438m로 우룸치에서 식수로 사용한다.
다시 경관을 보면서 2시 30분에 버스로 내려왔다. 이들의 전통음식인 ‘낭’은 담백하고 맛이 좋았다. 실크공장과 인민광장을 들린 뒤 야시장에서 다시 맛난 양 꼬치를 먹고 공항으로 향했다.
4시간 30분의 비행 후(2시-7시 30)-시차 1시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인천은 섭씨 10도 이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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