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책이야기

23-13 모래알만한 진실이라도

paula won 2023. 9. 1. 13:01

23-13 박완서, <모래알만한 진실이라도>, 세계사, 2021. 3.***

P20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나보다는 착해 보이는 날이 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고, 그런 날은 살맛이 난다.

P32 사람들이 갈수록 더 똑똑해지고 있다. 그럴수록 불쌍한 이웃을 보면 이런 똑똑하고, 지당한 이론 대신 반사작용처럼 우선 자비심 먼저 발동하고 보는 덜 똑똑한 사람의 소박한 인간성이 겨울철의 뜨뜻한 구들목이 그립듯이 그리워진다.

P74 너무 잘해주는 친척 집보다 불친절한 여관방을 차라리 편하게 여기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필요한 것이 알맞게 갖춰져 있고 홀로 시간이 넉넉히 허락된 편안한 내 방이 언제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아릿한 향수와 갚은 평화를 느낀다.

P111 다행히 집 앞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요새 같은 장마철엔 제법 콸콸 소리를 내고 흐르지만 보통 때는 귀 기울여야 그 졸졸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물소리는 마치 다 지나간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게 돼 있다, 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그 무심한 듯 명랑한 속삭임은 어떤 종교의 경전이나 성직자의 설교보다도 더 깊은 위안과 평화를 준다.

P134 남의 좋은 점만 보는 것도 노력과 훈련에 의해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으니 ……. 남의 좋은 점만 보기 시작하면 자기에게도 이로운 것이, 그 좋은 점이 확대되어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변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P136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아무도 그의 쓸모를 발견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발견처럼 보람 있고 즐거운 일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알아주는 장미의 아름다움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도 좋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들꽃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 소박하고도 섬세한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것은 더 큰 행복감이 될 것입니다.

P139 모든 불행의 원인은 인간관계가 원활치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내가 남을 미워하면 반드시 그도 나를 미워하게 돼 있습니다. 남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는 잘못한 거 없는데 그가 나를 싫어한다고 여기는 불행감이 거의 다는 자신에게 있습니다.

P147 손자와 함께 맡는 민들레 꽃 내음은 참으로 좋았다. 그 조그만 게 피어나기 위해 악착같이 뿌리 내린 흙의 저 깊은 속살의 꿋꿋함과 그 조그만 것까지 골고루 사랑한 봄바람이 어질고 부드러운 마음까지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P151 제일 예쁜 건 아이다운 애다. 그 다음은 공부 잘하는 애 지만 약은 애는 싫다. 차라리 우직하 길 바란다. …… 커서 만일 부자가 되더라도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수준에 자기 생활을 조화시킬 양식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부자가 못 되더라도 검소한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되 인색하지는 않기를. 아는 것이 많되 아는 것이 코끝에 걸려 있지 않고 내부에 안정되어 있기를. 무던하기를. 멋쟁이이기를.

P168 다쳐서 피 났을 때 입김보다는 충분한 소독과 적당한 약이 더 좋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입김이 서리지 않은 집에서도 컬러텔레비전과 냉장고 속에 먹을 것만 있다면 허전한 걸 모르는 아이들이 많아져 가고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아이는 처음부터 입김이 주는 살아있는 평화를 모르는 아이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입김이란 곧 살아 있는 표시인 숨결이고, 사랑이 아닐까? 싸우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심심해 하지 않는 게 평화가 아니라 그런 일이 입김 속에서,

P216 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 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 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 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 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P232 와중에 있는 것보다는 약간 비켜나 있으면 돌아가는 모습이 더 잘 보인다는 것도 터득하게 되었다. 비켜나 있음의 쓸쓸함과,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사람 사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거리를 가장 잘 보이게끔 팽팽하게 조절할 때의 긴장감은 곧 나만이 보고 느낀 걸 표현해보고 싶은 욕구로 이어졌다.

P257 내 주름살의 깊은 골짜기로 산산함 대신 우수가 흐르고, 달라지고 퇴락한 사물들을 잔인하게 드러내던 광채가 사라지면서 사물들과 부드럽게 화해하는 시간, 나도 내 인생의 허무와 다소곳이 화해하고 싶다. 내 기억 속의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해도 어느 조촐한 툇마루, 깨끗하게 늙은 노인의 얼굴에서 내 어릴 적 동무들의 이름을 되살려 낼 수 있으면 나는 족하리라.

P286 내 둘레에서 소리 없이 일어나는 계절의 변화, 내 창이 허락해주는 한 조각의 하늘, 한 폭의 저녁놀, 먼 산 빛, 이런 것들을 순수한 기쁨으로 바라보며 영혼 깊숙이 새겨두고 싶다.   …… 가을과 함께 곱게 쇠진하고 싶다.

'2023년 책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3-15 그림 엽서 한 장 띄워  (0) 2023.09.01
23-14 생의 모든순간을 사랑하라  (0) 2023.09.01
23-12 바람이 너를 지나가게 하라  (1) 2023.08.10
23-11 소로우의 강  (1) 2023.08.10
23-9 황혼  (0) 2023.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