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 박완서, <황혼>, 휴이넘, 2015. 초판 10쇄 **
P13 낡고 오래된 것은 전부 버려야 할까요? 사람이든 사물이든 오랜 세월을 견뎌온 것들에는 깊은 추억이 쌓여 있어요.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에 있는 주름이 여러분과 여러분 부모님을 위해 산 세월의 흔적인 것처럼 말이죠.
p21 늙은 여자는 눈 감고 창 밖의 어둠이 군청색으로, 남빛으로 엷어 지면서 문틈을 통해 맑고 차가운 샘물 같은 새벽 바람이 스며들던 옛집의 새벽을 떠올렸다. 그 여자의 옛 기억은 아주 또렷했다. 아파트 촌의 새벽이 그 여자의 옛 생각을 따라 밝아 왔다.
P41 늙은 여자는 웃으면서 일어나 앉아 거울을 본다. 거울 속의 여자는 울고 있었다. 엉엉 울고 있었다. 아무리 웃기려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거울 속의 여자 쯤은 자기 마음대로 될 수 있으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P43 육체적 고통보다 무서운 정신적 소외 ……. <황혼>에 등장하는 젊은 여자는 자기도 늙어서 노인이 될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좁은 골방에 노인을 가두어 두고 하루 세 끼 밥만 먹여 드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어머니를 공경할 줄 모르고 시어머니가 어떤 내적인 아픔을 가지고 있는지 헤아려 주지 않습니다. 자기 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남을 이해할 의지와 지혜가 없습니다. 물질적, 육체적 결핍이나 불만보다 더 아픈 것이 정신적 소외의 고통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타인의 진정한 아픔에 대해 상상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그 자신이 사물을 물질적, 육체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P207 “난 지금 아주 편안해. 신기하도록 편안해. 가난하게 살긴 했지만 이렇게 한 푼도 없어 보기도 처음이야. 이렇게 편해 조기도 처음이야. 혜림인 아마 모를 거야. 돈이 없어도 사람에게 이렇게 편안하고 깨끗한 기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이 기분을 모르는 인간에겐 이 기분을 베풀어 주고 싶을 만큼 나는 지금 기분이 좋아. 혼자서 간직하기엔 아까운, 마치 신선이 된 것 같은 기분이야.”
P208 두 사람 덕분에 한복 집을 냈던 순복이 망하자 아름다운 베일에 싸여 있던 혜림의 이기적인 성품이 드러납니다. 반면에 잘살지 못하는 ‘나’는 갈 집조차 없어진 순복을 위해 비어 있는 방을 내줄 생각을 합니다. 작가는 잘사는 사람이 베풀 수 있는 인정의 한계를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어려운 상황일수록 또렷이 드러나게 마련인 사람 됨됨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일까요?
P214-215 하나는 부모 세대의 가치 체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물려받는 일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부모 세대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물려받는 대신에 그런 것에 기대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전자의 삶의 형태는 전통 지향적입니다. 여기서는 부모를 봉양하는 효도를 인간 윤리 규범 가운데에서도 으뜸가는 것으로 중시합니다. 후자의 삶의 형태는 새것 지향적입니다. 여기서는 부모의 가치 체계를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모를 봉양하는 효도를 낡은 도덕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의 욕구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 작가는 이러한 현대 사회의 생활방식이 점점 더 사회를 혼탁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습니다.
P215-216 정신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는 수세식 변소의 유무나 동물 애호 정신으로 ‘야만’ 여부를 따지려는 세태를 비판하는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이 소 설에서 화자인 ‘나’는 물질적인 문명의 혜택을 얼마나 많이 누리느냐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런 물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합리적이고 양심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 하는 정신적인 기준에 따라서 ‘야만’의 여부가 판별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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