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책이야기

23-07 어른노릇 사람노릇

paula won 2023. 4. 19. 08:41

23-07 박완서, <어른 노릇 사람노릇>,작가정신, 1998. 2. **

P31 그 시대를 분기점으로 우리가 비로소 굶주림에서 벗어났다는 공도 인정해야 된다는 소리에는 나도 동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박대통령이 국립묘지에 묻혀 있고, 그 정권을 보필하기도 하고 아부하기도 한 세력들이 한번도 척결되거나 도태됨이 없이 지금까지 능력껏 꾸준히 고위 공직에 머물러 있거나 정치 일선에서 뛰고 있으면 됐지 더 어떻게 그 시대를 인정하고 용서하란 말인가. 용서와 망각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용서는 하되 잊어버리지는 말자.

P42 한 사람의 목숨의 무게는 이렇게 크다. 그가 제대로 살았고 할 일을 많이 남겨 놓았을 때는 더하여, 살아남은 사람을 휘청거리게 한다. ……. 우리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랴?’ 에 동의해선 안된다. 그건 나쁜 속담이다. 소를 잃어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더군다나 우리는 소가 아니라, 사람이다.

P49 비록 방에 웃 풍은 세도 포대기를 깔아놓은 아랫목은 장판지가 검게 변할 만큼 따끈따끈했고, 입에서 시루떡 같은 입김을 내뿜으며 학교 갔다 온 아이들은 곧장 안방으로 들어와 포대기 밑에 발을 집어 놓았다. 온 가족이 아랫목에 발을 넣고 서로 몸을 부비며 따뜻한 군고구마라도 먹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한겨울에도 발벗고 살면서 냉장고문이나 수없이 여는 요새 아이들은 아마 모를 것이다. 그때 아이들은 요새 아이들처럼 늘적지근 하지 않고 참으로 씩씩했다.  ….. 포대기 밑에서 체온을 나누며, 군고구마 먹는 내 새끼가 어떻게 빗나갈 수가 있으며 배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P55 넉넉한 마음은 돈 좀 있다고 흥청망청 쓰는 허세나 낭비벽하고는 다르다. 어려울 때 더불어 살아남을 수 있는 지혜요 배려이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안 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P60 그저 공부만 잘해라 그게 효도다 하고 기르다가, 그저 너 하나만 잘 되면 그게 효도다 하다가 그저 너희만 잘 살아라, 보모 신세 안 지는 것만도 효도다, 그렇게 키워 놓고 보니 도무지 받을 줄만 알지 줄 줄을 모르는 자식들을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그 벌로 자식한테 옷 한 벌 못 얻어 입고 떠날 채비를 해야 되는 가. 우리 또래의 노인이 얼마나 잘 났는지는 모르지만 그 모양이 쓸쓸하다.

P93 자식들은 가끔 내 생각을 하며 그리워도 하고, 나를 닮은 목소리로 제 자식을 나무라고, 나를 닮아 잘 웃으며, 열심히 일상을 살다가 문득 자신의 나이들어가는 모습에서,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죽은 에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때 자식들이 이 에미가 남기고 간 희미한 자국을 혐오하지 말고 따뜻이 받아들였으면 하는 게 이 세상에 대해 내가 아직도 못 버리고 있는 미련 중의 하나이다. …… 특히 내가 소유하고 있던 물건이 내가 죽은 후에도 남아 있을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잠 안 오는 밤이면 부시시 일어나 옷장이나 서재를 뒤져 버릴 것이나 남 줄 것을 찾는다. 가진 것을 줄여야 지, 최소 한도만 가져야지 벼르건만 가진 것은 좀처럼 줄지 않는다 가구를 집에 새로 들이지 않은 지는 오래됐지만 옷은 없앤 만큼 사게 된다.

P103 나는 호박 잎 쌈은 숭덩숭덩 썰은 풋고추와 된장 덩어리를 같은 분량으로 반반씩 넣고 걸쭉하게 지진 강 된장을 얹어서 싸 먹어야 제 맛이 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P137 섬진강을 낀 길을 택했다. …. 평야가 아니라 산간을 흐르는 강이건만 흐름이 급하지 않고 은빛 모래사장이 넓고, 그리고 사람 사는 아기자기한 마을을 겁주지 않고 가까이 끌어당겨 동무해서 흐른다. 마치 얕은 시내나 개울물처럼 겸손하게.

P145 평사리의 주거 양식의 특징은 집집마다 공루라는 다락방을 두고 있다는 데 있다. 물건을 수납하는 다락이나 벽장과는 달리 공루는 대개 바깥채의 문간 옆 광이나 마루방의 천장을 이용해 바람이 잘 통하게 망루처럼 꾸며 놓았다. 공루는 누구 집 공루든 지 앞 벌을 향해 탁 트여 있다.

P181 아이의 손은 어쩌면 그렇게 방금 움튼 새순과 닮았는지 아이의 이런 새순처럼 작고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생명력을 감지하고 있노라면, 늙음이 아무리 흙으로 돌아갈 날만 남겨놓고 있다고 해도 그다지 서럽거나 허망할 것도 없을 것 같아 슬그머니 유쾌해 지곤 한다.

P186 일전에 어떤 분 한테서 영화를영화관에서 보는 것과 집에서 비디오로 보는 것의 차이를 생선을 싱싱한 활어로 먹는 맛과 냉동한 걸로 먹는 맛의 차이로 비유하는 소리를 듣고 참 적절한 비유라고 공감한 적이 있다.

P190 어린이 혼자서 보게 내버려둬서는 안된다. 옆에 잠시만 붙어 앉아서 같이 봐줘도 어린이가 얼마나 많은 질문을 갖고 있는지 놀라게 된다. 겨우 말을 할 수 있는 나이만 돼도 우주선 만화를 보면 엄마 재는 왜 떠다녀? 접시가 왜 날아다녀?” 하고 묻는다. 그 애한테 구태어 무중력 상태를 설명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 우주선 안 이니까 그렇다라고 만 말해도 그 아이는 지금 몸 담고 잇는 현실과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다.

P199 유년기의 고향집 마루는 드높고, 북창은 뒷동산의 솔바람과, 산에서 발원해서 우리 집을 끼고 도는 개울물 소리의 거침없는 통로였다. 문득 든 낮잠에도 어른들은 풀 먹인 홑이불을 살포시 덮어주었고, 잠결에도 한기가 돌아 그걸 어깨까지 끌어올리면서 듣는 매미 소리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서지는 폭포 소리를 연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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