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년 책이야기

22-19 나의 할머니에게

paula won 2022. 6. 30. 08:32

22-19 윤성희외 5, <나의 할머니에게>, 다산책방, 2020.3.**

P44체중을 수십 년째 유지하고 가지런한 백발의 단발머리를 고수하던 나의 할머니, …… 할머니는 일본어에 매우 능숙했고 계란 말이와 계란 찜을 일본식으로 달짝지근하게 만들었으며, 에델바이스를 영어로 부를 줄 알았다. 다른 할머니들과 달리 교육수준이 높은 할머니 덕택에 나와 내 동생은 엄마의 부재를 상대적으로 덜 느낄 수 있었다.

P51 시간이 갈수록 할머니안의고돌은 눈처럼 소리없이 쌓였다. 처음엔 곧 녹을 수 있을 듯 얇은 막으로. 하지만 이내 허리까지 차오를 정도로 두텁고 단단한 층을 이루었겠지. 그렇지만, 나는 가까스로 생긴 친구들 눈에 지나치게 심각하고 유머 감각이 없는 전형적인 아시아 여자애로 보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할머니가 막 생리를 시작한 나에게 생리대를 사주기 위해 슈퍼에 갔지만 탐폰들만 잔뜩 있는 진열장 앞에서 그것들이 무엇인지 몰라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긴긴 하루를 견디다 지루해지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일부러 일본 식품점에 가지만 일본인 주인과 유창하게 의사소통 할 때마다 자긍심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는 사실 역시 미처 알지 못했다.

P81 나는 말수가 많은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명주의 표현을 빌리자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약간 쓸데없이 열정이 넘쳐서, 상대의 의사와 상관없이 길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할머니는 이런 내가 걱정되었는지, 항상 말하곤 했다. “진서야, 모든 사람 마음이 너와 똑같지 않아. 선을 지켜.”

P83 우리가 친한 이유를 말이다. 시간 때문인 것 같았다. 명주가 나와 비슷한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사람이어서 그렇다고 말이다. 나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서 비슷한 시간에 잠드는 사람. 언제든 만나서 수다를 떨 수 있는 같은 동네 친구. 나와 함께 있어준 사람.

P208 민아는 배급 받은 로즈메리 티백을 낡은 찻잔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아이들의 존재만으로 방은 무채색에서 화사하게 바뀐 듯했다. 핑크색 바탕에 금색 줄이 그어진 도톰한 라운드 티를 입은 유리가 뜨거운 찻잔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허리까지 내려드린 유리의 구불구불한 머리는 빛이 닿으면 회갈색으로 변한다. 초승달을 닮은 아인의 눈은 밤의 바다를 연상시켰다.

P211 유리창이 흐린 이유는 그 사이에 낀 먼지 때문일 것이다. 민아는 아무리 닦아도 맑아지지 않는 유리창이 현재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P221 풍경만은 아름다웠다. 노란 암캐라며 욕지거리를 들었던 이국의관광지도, 승진에서 밀려난 뒤 몰래 나와 울던 비상구 창 밖으로 내다보이던 시린 도시의 전경도. 어쩌면 그 풍경 들에서 민아는 희망을 발견했던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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