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9 박완서, <호미>, 열림원, 2007, 20쇄. **
P22 자연의 질서를 긍정하고, 거기 순응하는 행복감에는 그런 불안감이 없다. 아무리 4월에 눈보라가 쳐도 봄이 안 올 거라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변덕도 자연 질서의 일부일 뿐 원칙을 깨는 법은 없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배우는 마음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사물과 인간의 일을 자연 질서 대로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가 아닐 까.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이 혹은 누군가가 거두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
P54 흙 길을 걷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 느끼기만 하면 된다. 요샌 한창 땅 기운이 왕성할 때다.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산천초목을 통해 지상으로 분출하고 있다. 흙 길을 걷고 있으면 나무 만큼은 아니라도 풀만큼도 못하더라도 그 생명력의 미소한 부분이나마 나에게도 미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P117 이 세상에 내 집처럼 편한 쉼터가 어디 있겠는가. 늙어갈수록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고 적당히 따습고 적당히 딱딱한 내 집 잠자리에 다리 뻗고 눕는 것만큼 완벽한 휴식은 없다.
P186 강 된장과 호박잎쌈; ….. 된장을 뚝 떠다가 거르지 말고 그대로 뚝배기에 넣고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고 마늘 다진 것, 대파 숭덩숭덩 썬 것과 함께 고루 버무리고 나서 쌀뜨물 받아 붓고 보글보글 끓이다가 풋고추 썬 것을 거의 된장과 같은 양으로 듬뿍 넣고 또 한소끔 끓이면 되직해 진다.
P189 젊었을 적의 내 몸은 나하고 가장 친하고 만만한 벗이더니 나이 들면서 차차 내 몸은 나에게 삐치기 시작했고, 늘그막의 내 몸은 내가 한평생 모시고 길들여온, 나의 가장 무서운 상전이 되었다. 몸에는 혀만 있는 게 아니다. 입맛이 원한다고 딴 기관에 해로운 걸 마냥 먹게 할 수도 없다. 내 몸의 그 까다로운 비위는 나 아니면 맞출 수가 없다.
책 머리에서 요즈음 들어 나도 모르게 어질고 따뜻하고 위안이 되는 글을 소망하게 되었다. 아마도 삶을 무사히 다해간다는 안도감 – 나잇값 때문일 것이다. 날마다 나에게 가슴 울렁거리는 경탄과 기쁨을 자아내게 하는 자연의 질서와 그 안에 깃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감사를 읽는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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