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 양귀자, <부엌신>, 살림, 2000. 10쇄. *
P23 부뚜막에 물을 담은 조왕 보시기를 얹어놓은 부엌풍경은 그리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예부터 부엌은 집안을 보호하는 곳이라 하여 청결하고 신성하게 다루었고 불과 물을 다루는 부엌의 신을 조왕신, 혹은 불의 신, 부뚜막신 등의 이름으로 모시는 민간 신앙이 우리 삶에 넓게 퍼져 있었다.
P38 메뉴를 정하기 위해 맛있다는 집들을 순례하고 다니면서 하나 깨달은 것은 소박하면 소박한 대로 화려하면 화려한 대로, 접시 위에 ‘멋’을 제대로 부릴 줄 아는 요리사가 ‘맛\도 제대로 낸다는 사실이었다.
P64 우리의 생각은 정녕 그런 것이었지만, …… 나무에게는 혹시 셋만의 저녁식사가 행복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찾아와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가지던 우리가 그리웠던 것인지도 모를 일 이었다.
P86 현실과 욕심 사이에서 나는 숱한 갈등을 거듭했다. 갈등 끝에 나는 마침내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 대원칙 한 가지를 찾아냈다. ….. 이윤 추구보다 진심 추구가 우선이다.
P118 두 사람이 떠난 자리는 금새 새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한 번 떠난 내 첫 마음은 잘 채워지지 않았다. 하기야 첫 마음이란 그런 것인지 몰랐다. 인생에 있어서 ‘처음’이란 의미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무엇, 이란 뜻일 것이었다. 어떤 지우개도 소용없는 깊은 자욱.
P152 수령이 높은 모과 나무는 자태도 아름다웠지만 봄철의 만개한 꽃이나 주렁주렁 매달린 여름의 열매, 사방에 모과 향을 풍기며 익어 가는 가을 풍경, 그리고 준엄한 마른 가지를 뻗치고 있는 겨울 모습까지, 사시사철 창가에서 내다보는 즐거움이 큰 나무였다.
P246 태도가 겸손하고 인격이 절로 드러나는 좋은 손님을 만나면 돌아가는 뒷모습까지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다. 더불어 나 역시 어떤 다른 이에게 좋은 손님으로, 혹은 좋은 사람으로 뒷모습이 기억되고 싶다는 선한 욕망을 한껏 충전 받게 된다.
P274 모과 나무도 끊임없이 사람들과 공사 장비에 시달렸다. 나는 새삼스럽게 오래오래 나무들을 바라본다. 그랬음에도 지금, 아무 내색없이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는 나무들. 그러나 거기, 흔적은 남아있었다. 모과나무 둥치 여기 저기에 맺혀진 옹두리들, 병과 상처를 이겨낸 자국으로 남아있는 옹두리 서너 개를 나는 보았다. 모과나무 옹두리를 하나 하난 손으로 쓸어보면서, 거기에 맺힌 모과나무 삶의 사연들을 추측해보면서,
'2020년 - 책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9 잠든 행복을 깨워라 (0) | 2020.12.06 |
---|---|
20-28 바바호 마레 1호점 (0) | 2020.11.19 |
2026 모두가 기적같은 일 (0) | 2020.11.13 |
2015 들풀도 고향이 있다 (0) | 2020.11.13 |
2024 밥시 (0) | 2020.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