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6 박노자,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한겨레출판, 2009, 17쇄. **
P32 물론 ‘말 잘 듣는’ 아이를 ‘착한 아이’로 부르는 가정과 머리 길이까지 규정하고 체크하는 학교를 거쳐 대학에 들어온, 집과 학교에서의 ‘체벌’이라는 일상적이고 합법적인 폭력 속에서 자란 아이들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을 유사 근대적인 권위주의 체제의 ‘로봇’으로 만든 것은 폭력과 훈육의 사회다.
P40 대학 입시가 없고 실업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보니 학교 성적을 잘 받으려고 서로 경쟁하는 일도,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등수’를 매기는 일도 전혀 없다. ‘체벌’이라는 용어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아이들을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야단치는 선생님은 교육자로서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아 권고 퇴직의 위기에 처한다. 언어 숙달은 창조력의 발로이고, 아이의 창조력은 바로 경쟁과 폭력이 없는 환경에서만 제대로 발전할 수 있다.
P51 노르웨이에서 내가 목격한 것은 소비하려는 욕망보다는 오히려 소비를 되도록 줄이려는 구두쇠식 욕구다. 예를 들어서 점심시간 때 비교적 값싼 학교 식당을 찾는 교수들이 돈을 내고 사는 것은 고작 차나 커피 한 잔이다. 거의 예외없이 도시락을 싸와서 먹는다. 어떤 사람은 아예 인스턴트 커피까지 가져와서 공짜로 주는 뜨거운 물로 커피를 만들어 마시면서 “오늘은 돈을 한 푼도 안 썼다” 며 동료들에게 자랑한다.
P53 그러나 개인소비에서는 ‘군살 도려내기’를 즐기는 노르웨이 ‘자린고비’들이 국제 원조에는 오히려 적극적이다. 원칙적으로 해마다 국내총생산의 약 1%를 주로 노르웨이 개발 기구를 통해 최빈국의 기아 구제와 개발 등에 써야 한다.
P88 역사적 가해자 집단의 일원이 가해 사실을 외면하고 현실과 무관한 탐구에만 몰두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 나로서는 노르웨이의 시민적 영우, 헤위에르달이 대표하는 미디어 학술이 과연 그 인기만큼 서구인들의 세계 인식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는지 의심스럽기 그지 없다. 그의 탐험이 부유한 노르웨이를 탐험의 종주국으로 만드는 데는 크게 기여했지만, 탐험의무대가 되어준 남태평양과 라틴아메리카 주민들에게 남은 것은 여전히 가난과 알코올 중독이었다.
P82 18세기에 영국이 노예를 운반하는 데 사용한 노예선의 설계도 최소한의 공간에 당시 가장 좋은 상품인 인간을 얼마나 많이 넣으려 했는지를 보여준다.
P93 19세기에 유럽인이 원주민을 멸종시킨 유명한 사례로는 30년 밖에 걸리지 않은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 섬 주민들에 대한 계획적 섬멸을 꼽을 수 있다. 양을 칠 공간이 필요하다 하여 ‘동물보다 못한’ 원주민을 ‘없애기로’ 한 영국계 이주민들은 붙잡힌 원주민들을 ‘재미 삼아’ 생화장하거나 부인에게 남편의 주검을 어깨에 들러 메게 하고 달리기를 시키는 등 상상하기조차 힘든 비인간적인 방법들을 동원해서 짧은 기간에 원주민을 섬멸하는 ‘명예로운 과제’를 완성했다. 이 교과서적인 사례는 19세기 초반에 무기의 발달에 힘입어 유럽인의 야만성이 어느 정도까지 악질이었는 지를 매우 명확하게 보여준다.
P115-116 ‘탐파’ 사건으로 경악에 빠진 노르웨이에서는 인종주의적 편견에 빠져 인류의 보편적 박애 본능을 저버린 오스트레일리아 국민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 ‘탐파’는 결국 원래 예정한 대로 싱가포르로 향했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 백인들의 인종주의적 정서를 드러낸 이번 사건이 남긴 상흔은 크다. 결국 사경을 헤매는 제 3세계 사람들을 태연하게 따돌릴 수 있는, 오만한 제1세계가 분노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 상층부를 이루는 국가들이 대다수 하층부 국민들의 분노와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반인류적인 행위를 자행하고 잇는 현실에서 앞으로 세계체제의 앞날이 밝을 수 있을 지 의문이다.
P125 미혼모와 동거하면서 허름한 옷차림으로 음반 구입에 몰두하는 왕세자의 모습에서 ‘권위주의’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독서량이 비교적 많고 교양 있는 그의 몸가짐에서 약간 독특한 품위를 느낄 수는 있지만, 행동 자체는 그 나이 또래 일반인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P143 지금도 대다수 도시민들은 시골에 부모나 친척을 두고 있으며, 농민 출신임을 큰 자랑으로 여긴다. 그리고 선조의 마을에 가서 노동이나 등산을 즐기고 그 마을의 전통의상이나 조리법 등을 계속 유지. 발전시키는 것이 많은 노르웨이인의 소중한 취미다.
P153 한국의 교육 현실 전체다. 네 살 무렵부터 무얼 먹고 싶은지, 무얼 하고 싶은 지 아이의 의견을 묻고 대화를 이끌어내는 노르웨이식 교육과 “엄마 말 들어야지”를 반복하는 한국식 교육의 차이가 결국 선생님을 자신과 동등한 인격적 상대로 보고 거침없이 자기 주장을 펴는 노르웨이 학생과 권위 앞에서 움츠리는 한국 학생의 행동양식의 차이를 결정짓는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요즘 그는 복종을 강요하지 않는, 개인의 창의력을 키우기 알맞은 환경에서 자란 서구 젊은이와 어릴 적부터 인격과 사고를 이미 만들어진 틀에 맞춰가며 자란 한국의 젊은이가 장차 함께 경쟁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아파하고 있다.
P272 특히 군대에 입영할 젊은이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거나, “또 한 명 죽었구나 …….”라고 당연시하거나, “그걸 못 참아서 …… “라며 지극히 운명적이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매년 100여명이 군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고, 1,500여명이 탈영을 하고, 5,000여 명이 정신병을 얻는 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분신 자살한 현역 군인을 비롯하여 ‘군부적응자’들이 어쩌면 폭력으로 통제된 체제에서 인간으로서 극히 정상적인 저항을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P275 그들에게는 ‘체벌’이라는 말도, ‘규율’이라는 말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단지 ‘다른 인간과의 상호 존중’을 배울 뿐입니다. 초등학교에서도 수업을 앞두고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가만히들 있으라고 명령을 하거나 무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법이 없습니다. 그냥 아이들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줄 뿐입니다. 처음부터 ‘겁이 나서 억지로 하는 행동’이 아니라 ‘자기 책임’을 배워서인지, 대학에 들어가면 거의 다들 모범적으로 행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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