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9 신병주 지음, <왕으로 산다는 것>, 매일경제신문사, 2018. **
P24 태종, 인공 하천 청계천을 조성하다
P30 청계천 조성 사업은 한양이라는 도시의 구조에 눈을 뜬 태종의 안목과 실천 의지에서 출발했고, 한양이 최대 약점인 홍수의 피해에서 벗어나 큰 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태종의 청계천 조성 사업은 350년 뒤인 1760년 영조의 청계천 준천 사업으로 이어졌고, 오늘날에도 청계천은 서울이라는 도시를 대표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P119 광해군이 정치적으로 왕통 강화를 위해 무리수를 둔 점은 분명하지만, 내정 개혁이나 외교 부분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 광해군은 먼저 전쟁 중에 피폐된 토지의 회복과 민생의 부담을 덜어주는 데 공을 들였다.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를 전쟁 이전 상태로 회복하는 데 주력하는가 하면 대동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P130 조선이 자신들과 친교의 뜻이 있음을 확인한 후금은 조선 침공은 유보한 채 명나라 공격에 주력군을 파견함으로써 광해군대에는 국제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후금과의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 상황 속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냉철하게 힘의 현실을 인식하고 후금을 자극하지 않은 광해군의 외교적 역량이 큰 몫을 했던 것이다. 이것은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강력한 친명 배금 정책으로 외교 전략을 수정했다가,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한 것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P164 1637년 1월 삼전도의 굴욕 이후 청나라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한 소현세자. 청의 신문물을 보며 북학의 기운을 조선에 심으려 했던 소현세자의 생각은 부왕인 인조와 정면 충돌했고, 결국 세자의 의문의 죽음으로 마무리 되었다. 왕위는 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효종)으로 이어졌고 이제 조선의 국시는 북벌이 되었다.
P207 환국의 진정한 승리자는 숙종이었다. 어느 한 당파의 정치적 독주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숙종의 정치 역량은 영조 대 탕평책을 추진하는 데도 주요한 기반을 제공했다.
P236 영조는 조선시대 왕 중에서 83세로 가장 장수했고, 왕으로 재위한 기간도 52년으로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머물렀던 왕이었다. …..영조의 장수 비결에 관한 분석도 자주 시도되고 있다. …이런 분석에서 영조의 장수가 채식 위주의 식단을 짜고, 일생토록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한 것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영조는 정치적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왕의 권위를 강조했지만, 스스로는 철저히 서민적인 삶을 지향하고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편 면모를 보여주었다.
P293-294 이처럼 정조의 배다리 설계는 매우 치밀하고 과학적이었으며, 비용을 적게 들이면서도 다리의 안정성과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 특징이다. 배를 동원할 때 선주들에게 반대급부를 주어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한 점도 돋보인다. 정조는 체계적인 배다리 제도의완성을 통해 경제적인 부담도 줄이고, 잦은 화성 행차를 통해 백성들의 생생한 현장 목소리를 들었다. 정조의 효심과 과학 정신이 만들어낸 배다리 건설을 화성 행차의 또 다른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P308 1791년 정조의 강력한 의지와 이를 적극 실천한 채제공의 노력으로 단행된 신해통공에 의해 금난전권이 폐지됨으로써, 조선 초기 이래 400년 가까이 기득권을 가지면서 막대한 혜택을 입었던 권세가와 시전 상인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반면에 조선 후기 상업 발달의 기운과 함께 새롭게 성장하고 있던 다수의 소생산자나 영세 상인에게는 빛과 같은 조처였다. 특히 노론의 권세 가문이 시전을 장악하여 정경유착을 꾀하는 고리의 차단은 소상인과 도시 빈민 보호를 가능하게 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정조는 정치 개혁뿐만 아니라 경제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것이다.
P343 창덕궁 후원에 아름답게 자리를 잡은 연경당과 의두합, 그리고 폄우사 일대는 22세라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세도정치를 극복하고 조선 왕실의 부흥을 위해 분투한 효명 세자를 기억하는 공간들이다. 이들 공간을 찾아 아버지 순조를 대신하여 세도정치의 모순을 극복하려 했던 효명 세자를 기억해 보았으면 한다.
P413 헤이그 밀사 사건은 고종의 강제 퇴위로 이어졌다. 고종이 앞으로도 황제로 존속하는 한 대한 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이 힘들다고 판단한 일본은 고종에게 압박을 가하여 1907년 7월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한 나라의 왕비를 살해한 데 이어 왕마저 바꾸는 만행을 저지를 만큼 일본은 야만적이었고, 대한 제국은 힘이 없었다.
P419 명성황후 역시 건청궁에 거처하는 동안 일본의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러시아 등 서양 여러 나라와 활발한 외교 정책을 폈다.그러자 조선을 발판으로 대륙 진출의 꿈을 꾸고 있던 일본은 명성황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고, 1895년 10월 8일 일제는 건청궁 곤녕합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년다. ….. 이로써 건청궁은 한국 근대사의 최대 비극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황후의 죽음을 접한 고종은 1896년 2월, 신변에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후 경복궁은 왕이 살지 않는 궁궐로 남았다.
P425 백제 의자왕, 신라 경순왕, 고려 공양왕 등 망국의 왕들에게는 대부분 사치와 향락, 무능, 실정 등 부정적인 용어들이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다. 이것은 외국의 왕 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는 1908년 3세의 나이로 황제에 올랐지만 1912년 신해혁명으로 8세때 퇴위했다. 1934년 일본에 의해 만주국의 황제가 되었으나 일본의 패전으로 소련에 체포되었다가 중국으로 송환된 후 정원사로 말년을 보내는 등 비참한 삶을 살았다.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혁명 후 총살로 생애를 마감했다.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삶 또한 역사의 격랑 앞에서 고난의 연속이었다.
P432 일제에 의해 ‘이왕’의 신분으로 격하된 순종은 창덕궁에서 ‘망국의 황제’라는 비운을 안고 쓸쓸히 말년을 보냈다. 현존하는 초상화에서도 일부 드러나지만 순종은 생전에 병약했고 눈빛은 초점이 없는 모습이었다. 일설에는 고종을 독살하려고 누군가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탔는데, 커피 맛을 아는 고종은 이를 뱉어낸 반면 순종은 이를 모르고 그대로 마신 후 몸과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고 한다. 망국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했던 마지막 황제는 1926년 4우러 25일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생을 마감했다.
P445 조선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이방자와 덕혜옹주가 낙선재와 수강재라는 인근 공간에 함께 머물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로의 상처를 다독이며 만년을 함께한 것이다.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는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9일 뒤인 4월 30일 이방자 여사도 생을 마감했다. 조선 왕실의 마지막 황태자비와 마지막 공주는 1989년 같은 해에 생을 마감했고, 그렇게 조선 왕실의 상징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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