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7 변광섭 글, 손순옥 그림, 생명의 숲 초정리에서, 고요아침, 2010.***
힐링의 기술, 치유의 공간이 따로 없다. 숲이 보약이고 생명이며 희망인 것이다. 그곳이야 말로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이며, 어느 정갈한 여인의 촉촉하게 떨리는 입술이다. 늘 기장의 끈을 놓지 않는 아늑함의 그곳은 생명의 매트릭스다.
p14-15 생명이 있는 것은 아름답다. 아침햇살에 가슴 설레는 솔잎 향과 차가운 바람에 흔들리는 댓잎도 아름답다. ... 생명이 있는 것은 아름답다. 어느 도공의 감성과 영혼이 깃든 찻 사발이나 한 땀 한 땀 정성과 사랑을 담은 조각보는 사람의 온기까지 느낄 수 있어 좋다.
p22 세종은 행차에서 내리는 순간 초수리 맑은 기운에 넋을 잃었다. 산과 들, 싱그러운 바람과 낭창낭창한 햇살, 날렵하게 노닐고 있는 날짐승과 들짐승, 사람들의 정겨운 노랫소리와 무럭무럭 자라나는 푸른 새싹들, 올라가고 내려오는 길이 따로 없고 사람의 길, 짐승의 길이 따로 없는 생명의 풍경화....,
p96 우리 집 대문에는 아버지가 증평 읍내의 대장간에서 얻어 온 풍경이 걸려 있었다. 물고기 한 마리가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흔들이면서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쇠를 두드리게 되는데 그때마다 땡글땡글한 싱그러운 소리가 났다. 바다 속에서 하늘을 향해 지느러미와 꼬리를 치며 솟아오르는 것 같은 힘찬 소리, 숲 속의 풀잎 향을 머금은 것 같은 청아한 소리, 순백의 소녀가 콧소리를 내며 노래하는 것 같은 달콤한 소리 등 계절마다, 시간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각기 다른 소리를 냈다. 단 한 번도 똑같은 소리, 똑같은 노랙를 부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키질을 할 때나 아버지가 풍로를 돌릴 때는 풍경이 잠시 숨 고르기를 했다. 바람과 인간과 농기계가 트라이앵글을 이루는 순간만은 풍경도 관객이었다. 생활의 발견, 바람의 화원이 우리 집 마당에 가득한 순간인 것이다.
p106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 우물가 펌프질에 등 목하는 소리, 서리하는 소년의 발자국 소리, 자근자근 옥수수 씹는 소리,ㅡ 수박 씨 발라먹는 소리, 시집 못간 늙은 고모의 달 그림자와 한숨 소리, 이웃집아저씨의술주정소리, 뻐꾸기 부엉이 우는 소리, 후투디의 파닥거리는 소리, 치열한 생존의 현장에서 노래하는 여치와 매미의 합창소리, 개골개골 와글와글 별빛소리와 맹꽁이 소리... , 초정리 여름 밤을 하얗게 수놓았던 아름다운 소리들이다.
p158 인생이 이토록 고달프고 괴로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소년에서 청년으로 가는 세월을 홀로 외롭고 쓸쓸하게 보내야 했다. 이와 함께 학교 운동장을 닮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더 크게 하고 자신과 끝없이 싸우며 담금질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p159 길 위에 길이 있다. 그 길은 계절을 가로지르는 시간의 창이며, 계절과 맞닿은 공간의 문이다. 그 길은 언제나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투영하는 거울이며, 미지의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고행하는 투어리스트들의 상처 입은 가슴이다. 길은 만남의 또 다른 이름이다. 사람과의 만남, 자연과의 만남, 문화와 문명과의 만남, 그리고 자신과 끝없이 조우하고 온전한 인간으로 설 수 있는 지혜와의 만남을 주선해 준다.
p163 기다림이란 내가 소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의지이며 시간이라고.
p167 몇 푼 되지 않는 내 몫마저 나눠주고 함께 사랑하는 연말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며 신뢰하는, 그리하여 이 땅은 살만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면 더욱 좋겠다. 다시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마른 낙엽이 흩날리고 돌담 길 사이로 햇살마저 움츠리고 있으니 더 늦기 전에 마음의 구들장을 따뜻하게 데우고 싶다.
p170 부뚜막에 걸어놓은 가마솥에서는 콩 익는 냄새가 구수하고, 치마저고리를 입고 버선발로 메주를 만드는 모습이 마치 춤추는 새를 보는 것 같다. 행복한 사람의 얼굴에서는 화사한 빛이 난다더니 당신의 모습이 건강하게 반짝이고 있다
p176 그러니, 서두르지 말고 이기려 하지 말며 지나친 욕심을 갖지 말라. 느린 듯 빠르고 지는 듯 이기며 비운 듯 채워라. 그것이 행복이고 웰빙이며 삶의 지혜인 것이다.
p194 우리 조상들에게 부채는 느림의 미학이자 한지의 과학이었으며, 바람의 여유이자 삶의 지혜였고, 소통의 공간이자 예술의 극치였다. 부채만으로도 문화와 가풍을 엿보고 철학과 미술을 즐기며 시간과 공간, 사랑과 우정, 자연과 문명의 경계를 초월한 상상의 보고였으니 더 이상 헛다리 짚지 말아야겠다. 부채와 함께 가볍고 우아하게, 아름답고 앙증맞게, 멋스럽고 절제하며 살아야겠다.
p209 낮지만 질기고 예쁜 생명의 채송화처럼, 엉기 성기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돌담 사이사이에 햇살과 질경이의 배꼽 터지는 이야기처럼, 장독대에 재어 둔 어머니의 살뜰한 마음처럼, 늦은 저녁 소풍채비에 달그락거리고 구수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부뚜막처럼, 해질녘 마을 곳곳을 어슬렁거리는 연기와 장작 타는 소리와 마른 콩깍지 불꽃 튀는 소리처럼, 삭풍이 몰아치는 한 겨울에 홀로 외로이 덜덜 떠는 소쿠리의 홍시처럼 그렇게 춥고 가난하지만 사랑하고 기대고 위로하며 비벼주는 삶이 새삼 그립기만 하다.
p212 오래된 건물에는 신비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 기운이 때론 삶의 에너지로, 창작의 영감으로, 과거와 미래를 잇는 매혹으로 다가온다.
p218 마음의 곳간에 무엇을 채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품격이 달라지는 법이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가을엔 고독해지기 쉽다. 따사로운 햇살을 온 몸으로, 가슴으로 호흡하고 지혜의 메시지를 찾는 투어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p230 자신을 위해 일하는 손길보다 남을 위해 일하는 손길이 더 부드럽고 따뜻하다. 자신을 위해 화장하는 여인보다 남을 위해 화장하는 여인은 더 예쁘고 사랑스럽다. 등잔불 무명천 심지가 닳고 닳아도 어둠을 밝히는 생명과 그 생명 지치도록 바느질 하는 어머니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가슴 뜨겁다.
p251 " 만일 네가 한 그루 꽃나무라면, 너는 꽃으로 피기보다 꽃을 피우는, 희고 아름다운 뿌리로 살아라."는 ...
p255 "꿈은 꿈을 잃지 않는 자만이 이룰 수 있다."
p267 바람의 시간을 견뎌야 바위가 부드럽고 더 단단해지는 것처럼 참고 인내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자 합니다. 생각만으로는 앞을 향해 나갈 수 없습니다. 움직여야겠지요. 이제 생산적인 삶,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미래를 설계하고 싶습니다. 나 자신의 이익만을 쫓는 누더기 같은 인생이 아니라 진정으로 세상을 포용하고 사랑하며 삶의 에너지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헐거운 스토리가 아니라 신화와 전설, 삶과 문화, 인간과 자연이 마주하며 호흡하는, 그리하여 언제나 해살 부딪히는 맑은 소리 들리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생명의 곳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런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어 감사할 따름이다. 글이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될 수도 있구나는 생각이 든다. 이토록 마음을 정화시킬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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